■ 여성 독립유공자를 기억하다
독립유공자 1만7748명 중 여성 640명으로 3.6% 불과
유관순과 함께 권애라·심영식·신관빈·임명애도 기억해야
독립운동가 하면 누가 떠오르는가. 김구, 안중근, 윤봉길, 안창호 등등…
그러나 ‘여성’ 독립운동가는 어떤가. 유관순, 유관순, 유관순… 유관순 열사 외에 다른 여성독립운동가는 딱히 기억나지 않는다. 한국 사회는 그동안 여성독립운동가 활약상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들의 위대한 업적을 밝혀내 자랑스러운 민족임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 역사에 여성독립운동가들의 큰 활약상이 분명하게 남아 있다.
2023년 3월 기준 국가보훈부(전 국가보훈처) 자료에 따르면 훈장과 포상을 받은 독립유공자는 1만7748명인 가운데 여성은 전체의 3.6%인 640명에 불과하다.
여성독립운동가들은 임시정부의 살림을 도맡아 하고, 독립군 군복과 화약을 만들고, 도피자를 숨겨 주거나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모으는 등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헌신했다. 그러나 이들의 일은 공식적인 문서에 기록되지 않았다. 그래서 실제로 정부로부터 예우받는 여성독립유공자를 찾기가 쉽지 않다.
서대문형무소 여옥사에 수감된 여성독립운동가는 3·1운동에 참여한 유관순과 개성의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어윤희, 권애라, 신관빈, 심영식과 수원지역 만세운동을 이끈 김향화, 구세군 전도부인으로 파주 만세운동을 이끈 임명애 등 33명이었다.
이들은 주도적인 3·1운동 참여로 서대문형무소 8호에 유관순과 함께 수감됐고 일제의 가혹한 고문에도 꿋꿋하게 버티며 독립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우리는 여기에 우리 조선이 독립된 나라인 것과 조선 사람이 주인임을 선언하노라.’
이 글은 독립선언문의 내용이다. 1919년 3월1일 정오, 독립선언문 발표와 함께 전국적인 독립만세운동을 일으켰고 3·1운동은 일제강점기의 민족 최대의 독립운동을 넘어서 민족의 근간이 됐다.
이로써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대한민국’ 국호가 탄생했다. 그 결정적 계기는 3·1운동에서부터인 것이다. 3개월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200만명 넘는 국민들이 만세시위에 참여해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졌다.
국민에게 독립에 대한 열망과 자신감을 준 3·1운동은 각계각층에서 학생운동, 여성운동, 소년운동, 민족문화수호운동 등의 다양한 사회운동으로 뻗어 나갔다.
소년운동은 소파 방정환 선생을 중심으로 “어린이는 미래의 희망이며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라며 1923년 5월5일 어린이날을 제정했다.
이후 1926년 10월9일 한글날을 제정, 1929년 11월3일 광주 지역의 학생이 주도로 일어난 항일독립만세운동은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지정하며 학생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우뚝 서게 했다.
전민족적인 만세운동이었던 3·1운동에서는 여성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여학생, 교사 등 교육기관과 종교단체에 속해 있던 여성들은 기존의 관계망을 활용해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서울에서는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만이 아니라 이화학당, 배화학당, 정신여학교,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만세시위에 참여했다. 그로부터 이틀 뒤인 3월3일 개성 최초의 만세시위가 호수돈여자보통학교 학생들의 주도로 일어났다.
개성은 경기도에서 유일하게 3월1일 이전에 독립선언서가 도착한 지역이었고, 호수돈여학교 출신인 권애라, 심영식, 신관빈이 독립선언서 배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파주에서는 구세군 전도부인인 임명애의 주도로 교하리 공립보통학교에서 최초의 만세운동이 전개됐다.
3·1운동을 이끌었던 여성독립운동가들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지만, 열악한 옥중생활 속에서도 독립의 뜻이 담긴 창가를 부르며 독립정신을 지켜나간 것으로 전해진다.
3·1만세운동에 불씨 지핀 권애라
권애라는 1897년 2월2일 경기도 강화군 교동면에서 태어나 개성에서 자랐고 호수돈여학교에서 초등·중등과정을 마쳤다.
1919년 3월1일 호수돈여학교 부설 유치원 교사로 근무했고 어윤희와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하루 전에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오화영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아 만세운동을 추진했다. 그는 이 선언서 80여 매를 호수돈여학교에서 어윤희를 통해 주요 인사에게 배부됐고, 3월3일 학생들은 거리로 나와 독립운동가와 찬송가를 부르며 만세시위에 나섰다.
5월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경성복심법원에 상고했으나 7월4일 그대로 확정돼 옥고를 치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신체 한계 딛고 만세시위 선두에 선 심영식
심영식은 1887년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났다. 네 살되던 해에 열병을 앓은 뒤 시력을 잃게 됐다. 호수돈여학교를 졸업한 그는 1919년 3월3일 개성 송도면에서 모교 학생들과 군중대열의 선두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행진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같은 해 5월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을 선고받아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개성 3·1운동 확산 공로자 신관빈
신관빈은 1885년 황해도 봉산군 출신이다. 호수돈여학교를 졸업한 그는 1919년 당시 기숙사 사감이자 개성 북부교회 전도부인으로 활동했다. 1919년 3월1일 권애라, 심영식과 함께 개성 시내에서 독립선언서를 전하며 많은 이들이 만세운동에 참여할 수 있게 독려했다. 이튿날 교회에서 일경에게 붙잡힌 신관빈은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만삭으로 파주 3·1운동 이끈 임명애
임명애는 1886년 경기도 파주군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구세군(그리스도교파) 전도부인으로 활동했던 그는 1919년 3월10일 교하리 공립보통학교 운동장에 모인 학생들과 함께 파주의 첫 만세운동을 이끌었고 26일에는 주민들과 함께 면사무소로 행진했다. 이후 임명애는 만삭의 몸으로 6월3일 소위 보안법·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산을 위해 출소한 후 갓난아이와 함께 재수감됐고, 이때 8호실 동지들은 아이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던 것으로 전해진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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