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윤경호 선생 평생 숙원…전쟁 참상 제대로 알아야” 
10대 중·후반 학도병들, 작전이란 미명 아래 수장 
​​​​​​​국가유공자 “더러버서 안 해” 버티다 뒤늦게 등록

■호국보훈의 달 특집
   -화폭에 담은 남편의 6·25, 화가 정귀순씨

경북 고령 덕곡면, 농로를 따라 들어가니 햇볕 잘 드는 곳에 그림 같은 집이 있다. 이름 모를 꽃들이 담을 따라 수놓고, 새끼손가락만한 고추가 커 가는 텃밭 한쪽엔 비닐하우스가 있다. 테라스에선 커다란 항아리들이, 뒤란에 설치된 화덕 위에선 가마솥들이 반긴다. 화가이자 문학가인 정귀순씨의 집이다.
지난 4월까지만 해도 이곳은 정씨의 남편 윤경호 선생의 거처이기도 했다. 4월29일 작고한 윤경호 선생은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정씨는 “1934년생으로 올해 아흔이 된 남편은 살짝 치매도 있고, 그래서 주간보호소에 다녔는데 세상을 뜨기 한 달 전부터 ‘빨리 그려야 한다’고 재촉했다”고 돌이켰다. 고 윤경호 선생이 6·25 때 참전한 ‘장사상륙작전’을 묘사한 정씨의 그림 이야기다. 그림 크기가 200호(259.1㎝×193.9㎝)에 달하는 유화 작품은 옛 금광 입구를 막아 만든 정씨의 화실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 

화가 정귀순씨가 남편이자 지난 4월29일 작고한 국가유공자 윤경호 선생의 초상을 들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학도병 시절 윤경호 선생의 모습이다. 그 옆에는 그가 2008년 내놓은 고발 수기 ‘16세 학도병의 절규’가 놓여 있다.
화가 정귀순씨가 남편이자 지난 4월29일 작고한 국가유공자 윤경호 선생의 초상을 들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학도병 시절 윤경호 선생의 모습이다. 그 옆에는 그가 2008년 내놓은 고발 수기 ‘16세 학도병의 절규’가 놓여 있다.

“빨리 그려서 갖다줘라”
“지난겨울 내내 붙어 앉아서 그렸어요. 대작을 몇 개월 만에 그린다는 게 쉽지 않죠. 손이 퉁퉁 붓고 얼마나 춥던지….”

앞서 정씨는 지난해 같은 내용이되 크기가 작은 작품을 전쟁기념관에 기증했다. 전쟁기념사업회는 장사상륙작전 당시의 모습을 생생하게 재현한 작품 기증에 대해 감사패도 수여했다. 이후 전쟁기념관에 ‘학생(학도병)실’이 따로 마련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큰 벽면에 걸린 작은 그림이 무슨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을까.’ 정씨는 전쟁의 참상과 남편의 평생 숙원을 풀고자 벽면을 가득 메울 대작 구상에 나섰다. 그리고 최근에서야 작품을 완성했다. 

경북 영덕 장사리에서 수행된 장사상륙작전은 1950년 9월14일 새벽 5시를 기해 인천상륙작전의 양동작전으로 적후방을 교란해 보급로를 차단,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 작전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전투에 참가한 대원들은 대부분 학생신분이었다. 전사 139명, 부상 92명, 행불자 수십 명. 피해가 컸지만, 한동안 기밀에 부쳐진 탓에 이를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전쟁기념관에 걸리게 될 200호 대작 ‘장사상류작전’(사진 왼쪽)이 정귀순씨의 화실에 놓여 있다. 정씨는 고 윤경호 선생이 목도한, 학도병들이 수장되는 참상을 묘사했다.
전쟁기념관에 걸리게 될 200호 대작 ‘장사상류작전’(사진 왼쪽)이 정귀순씨의 화실에 놓여 있다. 정씨는 고 윤경호 선생이 목도한, 학도병들이 수장되는 참상을 묘사했다.

상이군경을 바라보는 시선 
“때만 되면 유공자를 기린다고 하지만, 사실 전쟁이 끝났어도 상이군경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따뜻하지 않았어요. 남편은 전쟁 중에 포탄에 맞아 얼굴과 손에 화상을 입었죠. 당시 머리카락도 다 타고 얼굴 전체가 물집이 생겨 한 덩어리가 된 채로 눈도 못 떴다고 해요. 평생 눈썹도 나지 않았죠. 나중에 내가 문신을 해주긴 했는데…. 하하하. 국가유공자 등록도 주변의 성화에 못 이겨 한참 뒤에 했어요. 고령에서 나고 자란 남편은 ‘더러버서 안 한다’고 자주 말했어요.” 

고 윤경호 선생에게 국가유공자 등록이 왜 못마땅하고 불쾌한 일이었을까. 그가 2008년 내놓은 고발 수기 ‘16세 학도병의 절규’에는 말로 다하지 못한, 억울하게 죽어간 전우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드디어 갑판문이 열리더니 상륙명령이 떨어졌다. 아마 1중대 1소대로 기억이 되는데 완전 무장을 한 채 20여명이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는데 10여분간 눈을 부릅뜨고 기다려도 사람이 올라오질 않았다. 모두가 수장되고 만 것이다.” 

관부연락선서 본 고국 모습
전쟁이 끝나고 공무원으로, 자영업자로, 농업인으로 삶을 이어온 고 윤경호 선생의 머릿속에 각인된 장면이다. 이름을 모르는, 그래서 이름이 없는 전우들의 생사 갈림길을 목도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학도병의 이야기다. 그 역시 수차례 사선을 넘나들었고, 수십 년 뒤에도 트라우마로 남아 악몽에 시달렸다. 

20여년간 고령문화원 부원장으로 활동해 온 정씨는 대구 신명여고를 졸업하고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한 입지전적의 인물이다. 화풍은 유채로 한국의 미, 전통문화를 살려내는 것이다. 1937년생인 그는 일본 고베에서 해방을 맞았다. 국전 등을 통해 이름을 알리면서 국내는 물론 여러 차례 해외 전시회를 열었다. 

“고베는 대도시였어요. 일본인이라고 알고 지내던 어느 날,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전해 들었죠. 부모님은 징용으로 일본에 건너온 것이었어요. ‘금수강산’으로 돌아가자고 하셨죠. 그래서 아버지의 나라는 ‘금붙이로 둘러싸인 땅이구나’라고 막연한 생각을 품었었어요. 하하하.”

해방 이듬해 부산 영도 앞바다 관부연락선에서 바라본, 초가집들이 따닥따닥 붙은 고국의 모습이 그의 작품세계의 모티브가 됐다. 1961년 부부의 연을 맺은 고 윤경호 선생과 화가 정귀순씨는 슬하에 2남1녀를 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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