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보훈의 달 특집-6·25 참전용사 남정주 선생에게 듣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친 분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그에 보답한다는 보훈(報勳). 누란의 위기에 처한 조국을 지키기 위한 그분들의 희생에 우리 후손들은 다시 한번 감사함을 가슴에 새겨야 할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았다.

어느덧 휴전 70주년을 한 달여 앞둔 6월, 6·25 전쟁 참전용사는 현재 4만7996명이 생존해 계신다. 국가보훈부 따르면 4월기준 75~79세가 3명, 80~84세가 426명, 85~89세가 1만821명, 90~94세가 가장 많은 3만1965명, 95~99세가 4528명이다. 100세 이상도 252명인 것으로 확인된다.

 

6·25 참전용사 남정주 선생(사진 왼쪽)에게 남미옥 회장(사진 오른쪽)은 목숨을 걸고 지금의 대한민국을 수호한 고마움과 함께 아버지로서도 자랑스럽다는 마음을 전했다.
6·25 참전용사 남정주 선생(사진 왼쪽)에게 남미옥 회장(사진 오른쪽)은 목숨을 걸고 지금의 대한민국을 수호한 고마움과 함께 아버지로서도 자랑스럽다는 마음을 전했다.

16살에 6·25 전쟁 참전…70년 지났지만 그날의 기억 생생
이질 피해 입영해 제주 육군 훈련소서 28일 훈련 후 대구 배치

생사의 갈림길…무수한 사망자
1935년생으로 아흔을 바라보고 있는 남정주 선생이 6·25 전쟁에 참전한 건 불과 16살 때였다. 70여년이 훌쩍 지났지만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전쟁 당시의 상황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그는 차분한 어조로 그날을 들려줬다.

“경기 양주에 조상대대로 400년 가까이 살았어. 3.8선이 코 앞이었지만 전쟁이 날 줄 알았나. 날벼락처럼 떨어진 그 포탄소리는 아직도 기억나. 의정부로 피난을 갔지만 이틀 만에 인민군이 들이닥쳤지.”

전쟁 발발 3일 만에 서울이 점령당하며 남정주 선생은 경남 양산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오직 걸어서 15일이나 걸린 거리였다. 살았다는 기쁨도 잠시, 전화를 피해 도착한 그곳은 또 다른 생사의 갈림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질이 창궐하면서 무수한 사망자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질이 돌면서 사람이 많이 죽었어. 여기 있다간 죽을 것 같아 입영 영장도 나오기 전에 입대했어. 피난 가는데 옷을 챙겨갈 정신이 있었나. 한복 한 벌 뿐이었는데 군대 들어가면 옷도 주고 씻을 수도 있을 것 같은 생각에. 그때는 어렸잖아.”

남정주 선생은 2000년 참전용사 증서를 받음으로써 나라로부터 국가유공자를 인정받았다.
남정주 선생은 2000년 참전용사 증서를 받음으로써 나라로부터 국가유공자를 인정받았다.

“전황 긴박, 목숨 붙어있는 게 다행”
나이를 20살로 속인 남 선생은 1951년 3월21일자로 입영하게 된다. 대부분 서류가 사라져버린 탓에 나이를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남정주 선생은 제주도의 육군 훈련소에서 요즘으로 치면 신체검사 현역 1급에 해당하는 ‘갑종’ 합격을 받았다. 전쟁이 워낙 긴박했던 탓에 장기간 훈련을 받을 수 없었지만 강한 병사의 부대라는 뜻의 강병대(强兵隊). 이름 그대로 이곳에서 길러진 강인한 군인들이 있어 서울 재탈환 등 반격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28일간의 군사훈련을 마친 후 대구의 제15경비대대로 배치받았다. 전쟁 이후 경찰이 없어져 군인이 그 몫까지 맡게 됐고, 후방지역은 무장공비가 득세하며 치안이 극도로 불안했다. 이에 정부는 1950년 경북 울진에 제1경비대대를 시작으로 대구 제15경비대대를 창설해 무장공비 토벌, 주요 병참시설 경계와 포로수용 등의 임무를 맡겼다. 남정주 선생은 국군과 미군이 북상하며 전방으로 이동해 발전소와 탄약기지, 통신소 등을 방어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탈영병도 많았고, 공비도 득실득실했지. 전방이랑 똑같았어. 전쟁이 끝나거나 제대할 거란 생각 못 했어. 하루하루 목숨이 붙어있으면 다행이라 생각했어.”

강원 화천의 6사단으로 재배치받은 남정주 선생. 그 지옥 같던 전쟁도 1953년 휴전협정을 맺게 되면서 1955년 1월, 꿈도 꿀 수 없었던 제대를 하게 됐다.

 

아흔을 바라보는 연세에도 남정주 선생은 텃밭을 가꾸는 건 물론이고 5만㎡  규모의 벼농사를 짓고 있다.
아흔을 바라보는 연세에도 남정주 선생은 텃밭을 가꾸는 건 물론이고 5만㎡ 규모의 벼농사를 짓고 있다.

나이 들고 걸음 불편해도 “영원한 현역”
새벽 5시30분 논으로 출근…집안일도 거뜬
“참전용사 대우 박하지만 지금의 삶에 행복”

나이 아흔 바라보지만 5만㎡ 벼농사
고향인 양주로 돌아왔지만 그의 몸은 성치 않았다. 오른손과 왼손 각각 손가락 하나씩을 잃었다. 복무 중 다친 것이었지만 자대에서 치료를 받은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지원을 받지 못했다. 2000년 참전용사 증서를 받으며 나라로부터 공식 인정받은 남정주 선생은 참전용사자 명예수당으로 매월 39만원을 받고 있다. 국가지원에 대한 아쉬움도 전했다.

“얼마 전에 국가에서 제복을 맞춰준다고 의정부에 치수를 재러 갔어. 그전엔 참전용사 마크가 찍힌 모자, 조끼는 내 돈으로 맞췄지. 다른 유공자보다 우리 참전용사는 대우가 박한 것 같아.”

목숨을 잃은 수많은 전우를 생각하면 살아있음에 감사하다는 남정주 선생은 제대 후 고향에서 농사꾼으로 한평생을 살았다. 현재 강원 철원에서 규모의 벼농사를 짓고 있다. 아직도 영원한 현역인 것이다.

“양주에서 벼농사를 짓다 도로가 생겨서 철원에 논을 샀지. 지금은 절반으로 줄였어. 작년엔 괜찮았는데 올해는 좀 힘드네. 나이는 속일 수가 없어.”

농한기인 겨울을 제외하고 그의 일과는 매일 새벽 5시 30분, 차로 1시간 30분 거리에 논이 있는 철원으로 출근하는 걸로 시작된다. 직접 운전해 논으로 향하는 그는 아들과 함께 벼농사를 짓고 있다. 아들에게 많은 걸 넘겨줬지만 아직도 그의 눈엔 성에 차지 않을 때도 있다고. 농사경력 70년에 가까운 베테랑 중에 베테랑인 그에게 어쩌면 당연한 일일 터.

“모내기를 끝냈어. 이젠 약 치고 피를 뽑아야 돼. 기계 힘을 많이 빌리지만 몸 쓰는 일이 많아서 아들한테 맡기고 12시쯤 퇴근해. 허리도 아프고 걷는 게 예전 같지 않아.”

아내의 기억력이 조금씩 감퇴해 집에 혼자 두기 불안해 새벽녘 논에 출근하는 일부터 퇴근 후 노인정에서 화투로 소일거리까지 하루종일 동행한다. 청소와 집안일도 그의 몫이다. 본인의 손으로 농사일에 집안일, 아내를 챙기는 일까지 할 수 있어 다행이란 그의 긍정적 태도야말로 영원한 현역의 비결이 아닐까.

“아버지가 자랑스럽니다”
남정주 선생은 자손으로 3남1녀를 뒀다. 유일한 딸인 남미옥씨는 올해부터 한국생활개선동두천시연합회장을 맡고 있다. 집에서 지척 거리에 사는 남미옥 회장을 비롯해 자식들이 경기도에 거주하며 남 선생과 아내를 챙기고 있다.

“자식들이 다 근처에 사니 좋아. 둘째 아들은 매주 밑반찬에 과일을 챙겨줘서 먹을 걱정도 없고, 딸도 자주 들러 적적할 새가 없지.”

남미옥 회장은 6·25 참전용사를 찾는 기자의 부탁에 아버지에게 취재를 어렵사리 부탁했다. 딸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 딸바보라는 남정주 선생은 남미옥 회장이 부탁하는 일이라면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전쟁 상황을 악몽으로 꿀 정도로 상처가 깊게 남아있어 당시 기억을 얘기하는 일을 부탁하는 건 쉽지 않았다.

남 회장은 “전쟁 얘길 워낙 하지 않으셔서 20살이 넘어서야 참전했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았어요. 이번에 인터뷰를 하시며 피난을 가서 어떤 훈련을 받고, 어디어디 참전을 하셨는지 알게 됐어요. 사람이 살고 죽는 죽음의 참상이 얼마나 아버지를 힘들게 했는지 가족은 다 지켜봤잖아요.”

인터뷰 내내 남정주 선생의 얘기를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듣던 남미옥 회장은 아버지에 대한 다시 한번 감사함을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고.

“아버지가 복무하시면서 몸도 다치고, 정신적으로도 많이 힘드셨을 거예요. 근데도 가족과 자식들을 위해 하루하루를 정말 열심히 사셨어요. 가족 모두가 증인입니다. 아버지 이전에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킨 윗세대에게 후손으로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합니다. 아버지들이 있어 우리가 있습니다. 고맙고 자랑스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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