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국보훈의 달 특집(3·1만세운동을 기억하다 : 독립유공자 후손 김보경·박영수씨 부부에게 듣는 할아버지 김교선)

“누가 만세 부른다고 따라 부를 양반이 아니고, 주도해서 앞장서 이끈 사람이 김교선 독립운동가입니다.”

충남 천안 수신면 주민들이 김교선 독립운동가를 증언했다. 김교선은 천안 수신면 발산리에 거주하는 농업인이었다. 1919년 3·1 운동 당시 28세의 나이에 홍일선·한동규·이백하·이순구 등과 아우내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김교선 독립운동가의 영정사진을 들고 있는 (사진 왼쪽부터)손자 김보경씨와 손자며느리 박영수씨, 증손녀 김진희씨
독립운동가 김교선의 영정사진을 들고 있는 (사진 왼쪽부터)손자 김보경씨와 손자며느리 박영수씨, 증손녀 김진희씨

마을리더였던 김교선…배고픈 시절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
유관순 열사와 아우내3·1운동 주도하고 2년간 옥고
화재로 소실된 유품·훈장, 후손들 증언으로 대 이어

독립운동 정신 알리고파
32년 전 남편 김보경씨와 결혼한 박영수(수신면생활개선회 총무)씨는 독립운동가 故김교선의 손자며느리다. 김교선의 직계 자손 4남5녀의 장남 김정희의 자손 5남5녀 중 막내가 박씨의 남편 김보경씨다.

세월이 흐르면서 김교선 독립운동가를 모르는 식구도 적지 않다. 게다가 집안에는 김교선 독립운동가의 유품과 정부로부터 받은 애족장이 화재로 불타 흔적조차 남지 않은 상황이다.

그래도 박씨는 3·1운동의 발생지인 수신면 주민들의 자부심을 알고, 지금은 시조부 김교선 독립운동가에 대한 업적을 누구보다 세상에 알리고 싶어 했다.

박씨의 작은어머니이자 김교선의 둘째아들 김정식씨의 아내 조분숙(90)씨는 박영수씨의 의지를 기특하게 여긴다. 조분숙씨는 시아버지 김교선에 대해 증언했다.

조씨는 “시아버님은 어려운 형편에도 벼농사를 지으며 지역 유지 3명을 모아 ‘삼미조합’이라는 방앗간을 처음 운영한 마을의 리더였다”며 “방아 찧는 날이면 시어머니와 저에게 밥을 많이 해오라면서 남을 배부르게 밥 먹이고 주변에 베푸는 것을 좋아했다”고 기억했다.

마을주민들과 동고동락하며 리더십이 돋보였다는 김교선 독립운동가. 배고픈 자에게 쌀 두말(36ℓ)을 나누고, 게으르고 밥만 찾는 이에게는 일을 부리고 쌀을 주는 원칙을 세웠다고 한다. 또 가난한 이웃에게는 창고를 헐어 집 지을 땅을 내줬다고 한다. 이 같은 사연은 김보경·박영수 부부가 수신면에서 조상의 땅을 찾는 과정에서 알게 됐다.

국가보훈부가 김교선 묘소에 세운 비석
국가보훈부가 김교선 묘소에 세운 비석

‘조선독립 만세’ 외치다
천안의 아우내독립만세운동 기념비에는 김교선 독립운동가가 당시에 3·1운동을 ‘주도한’이라는 관형사를 붙여 그의 활동상을 강조한다.

1919년 당시 김교선은 “유관순(16)이라는 어린 처자가 3·1운동을 계획하고 있으니, 어른들이 가만히 있을 일이냐”며 수신면 남성들을 모았다. 이후 김교선은 병천시장의 장날을 기해 ‘조선독립 만세’를 부를 것을 계획했다.

3월29일경 한동규와 이순구에게도 계획을 알리고 권유해, 4월1일 김교선·한동규·이백하·이순구는 홍일선과 함께 아우내장터에 도착해 이미 약속한 대로 아우내 장터의 출입구를 지켰다. 그리고 장터로 들어오는 주민들에게 ‘조선독립 만세’를 함께 부르도록 권유했고, 장터를 떠나려는 주민들에게는 되돌아가서 만세를 부르도록 했다. 만세운동에 참여한 시민이 3천명에 달했다고 천안시 디지털천안문화대전은 기록하고 있다.

일본군은 김교선을 체포하고 징역 2년에 처해 공주형무소(현 공주교도소)에 가뒀다. 시장에 모인 군중을 선동해 조선독립 만세를 부르게 한 혐의였다.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생계 어려워져
김교선 독립운동가가 옥살이를 하면서 여성들은 농사일에 일손이 부족해 갖은 고생을 했다고 한다. 그의 장남 김정희씨는 일본 유학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김정희씨는 경찰관으로 일하고, 수신면장을 지냈다. 하지만 중풍으로 쓰러져 병실에서 15년을 보내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당시 10살이었던 김보경씨는 “아버지가 병실을 전전하면서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도 듣지 못해 정확히 알지 못했다”며 “학교에서는 독립유공자 손자라고 운동화를 무료로 줬지만, 가난한 집안으로 비칠까봐 도망친 적도 있다”고 회상했다.

김보경씨는 덤프트럭을 몰고 아내 박영수씨와 멜론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김씨 부부의 딸 진희(28)씨가 집안의 변화를 일으켰다.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는 진희씨는 특수학교인 천안인애학교를 다니며 교과서에 실린 ‘김교선’을 알게 됐고, 이름이 같은 증조부의 영정사진을 유심히 관찰했다고 한다. 매체에서 홍보하는 ‘김교선 독립운동가’의 모습이 김씨 가족이 제사를 지내는 ‘김교선’의 영정사진 속 모습과 달라 동일인물인지 모르는 식구들도 많았다.

충남 천안 수신면 선산에 모신 김교선 독립유공자 묘소를 참배하고 있는 증손녀 김진희씨
충남 천안 수신면 선산에 모신 김교선 독립유공자 묘소를 참배하고 있는 증손녀 김진희씨

독립운동가 흔적 찾아나서
박영수씨는 “시조부님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린 건 우리 딸”이라며 “독립유공자 집안을 찾는 전화를 받고 용기를 낸 것도 진희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김정식 작은할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증조할아버지가 독립투사였던 이야기를 듣고 진희가 ‘김교선’에 대한 정보를 검색하며 자료를 축적해나갔어요. 명절에 친척을 만나면 김교선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것이 있냐며 적극적으로 묻곤 했죠.”

“텔레비전에서는 유관순만 나오고, 우리 증조할아버지도 훌륭한데 언제 나와요?” “독립투사의 유품은 기념관에서 보관한다는데 증조할아버지 물건은 왜 없어요?”

진희씨는 어른들에게 물어봤지만, 누구도 명쾌하게 답해주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박영수씨는 “진희를 위해 유관순열사기념관, 유관순 열사 생가를 찾아 ‘김교선 찾기’ 투어를 했다”며 “선산에서 시조부님의 비석을 읽어주면서 관심을 갖게 해줬다”고 말했다.

현재 김교선 독립운동가의 유해는 현충원이 아닌 수신면에 묻혀있다. 당시 조상을 집터와 가까운 곳에 모셔야 한다는 선조들의 소신에서 비롯됐다고.

박영수씨와 조분숙씨는 “당시에는 선조의 뜻에 따랐지만, 국가에 공을 세운 분들이 현충원에 안장되는 일이 명예로운 세상이 됐다”며 “앞으로 묘소가 어떻게 될지는 지켜봐야 할 일”이라고 협의했다.

국가보훈부(전 국가보훈처)에서는 김교선 독립운동가의 묘소에 비석을 세워, 독립운동에 앞장선 치적을 후대에서 기억할 수 있게 했다.

박씨는 “김교선 독립운동가의 업적을 후손들이 더 빨리 알아주고 윗세대가 살아계실 적에 전했으면 유품도 소중히 간직했을 것”이라며 “시어머니를 비롯한 자손들은 시조부님이 살아계실 적에 그 고귀함을 미처 깨닫지 못한 것 같다”며 아쉬움을 내비쳤다.

박영수씨는 딸 진희씨와 함께 김교선 독립운동가의 업적을 널리 알리는 데 힘을 보태겠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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