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특집 : 가정의 달, 농촌가정의 빛과 그림자
일평생을 가족과 자식을 위해 헌신하며 고된 농사일로 굽은 등, 깊게 패인 주름살, 새까맣게 탄 얼굴은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르신들의 모습이다. 억척스럽게 보낸 젊은 시절을 보상받으며 평안한 노년을 보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남편과 사별하거나 자식과 떨어져 적적한 하루하루를 흘려보내며 쓸쓸한 인생의 말년을 보내는 고령의 어르신들은 농촌의 또 다른 안타까운 단면이다.
취재차 만난 고령의 어르신 네분들은 부족한 돌봄시설과 일자리, 한정된 여가생활로 쓸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나마 이웃들과 단체회원들이 품앗이로 이들을 챙기며 정부와 지자체의 빈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한달에 병원비·약값만 수백만원…은퇴 없는 삶
평일은 요양보호사, 주말은 자손을 하염없이 기다려
코로나 이후 TV에 더 의존 “장민호·임영웅 보는 게 낙”
홀로어르신 돌봄 빈자리…정부 대신 이웃·단체가 메워
은퇴 없는 농촌 삶
김모(80) 할머니는 경기도 광주 남한산성 아랫자락에 터를 잡은 지 올해로 12년째다. 서울 강남 논현동에서 살다 사업실패로 광주로 내려오게 됐다. 고향인 경북 영주로 갈 수 있었지만 친척들이 많아 더 불편할 것 같은 생각에 원래 살던 곳과 가까운 광주를 택했다.
김 할머니의 동네는 광주 시내와는 거리가 상당하고, 인근이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 전형적인 농촌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워낙 동안인 얼굴에 80세를 넘겼을 거라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건강해 보이는 김 할머니에게서 노년의 고단함은 찾아보기 힘들어 보였지만 속내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기대했던 안락한 삶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남한산성 밑이라 공기도 좋고 남편과 운동도 다닐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근데 남편 건강이 갑자기 나빠지면서 몇 년 전부터 요양병원에서 지내고 있어요.”
남편의 병원비에 약값까지 달마다 이백만원 이상 들어가는데 외국에 사는 자식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자녀가 재산이 있다는 이유로 기초생활수급자 요건도 충족하질 못했고, 부부 앞으로 나오는 매달 48만원의 기초연금이 유일한 수입원이었다. 수소문 끝에 서울의 한 공장에 화장실 청소일을 겨우 구할 수 있었다. 백만원이 되질 않는 돈이지만 본인 생활비에 남편 병원비를 감당할 수 있어 할머니에겐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돈이다.
“동네는 공공일자리가 도시만큼 없어 서울에 일자리를 겨우 얻었어요. 새벽 4시에 일어나 6시 반쯤 공장에 도착해요. 동네에 다니는 버스는 3대뿐이고, 서울로 가는 버스는 1시간 30분에 한 대씩 와요. 그마저도 하루에 몇 번 다니질 않아 왕복 6시간은 걸려요.”
종교생활을 하며 마음의 위안을 얻어 본인 건강은 나이에 비해 좋은 편이라 다행이라며, 남편이 차도가 있기만을 바라고 또 바랐다.
요양보호사 오기만 기다려
김 할머니 옆 동네의 남모 할머니는 올해로 아흔을 훌쩍 넘겼다. 워낙 고령인지라 본인이 몇 년도에 태어나 몇 살을 먹었는지도 기억하질 못했다. 나이가 들어 자연스레 청력도 약해져 일반적인 대화도 힘든 지경이다. 오직 기다리는 건 평일 12시면 와 3시간 동안 할머니를 돌보며 점심과 저녁상을 챙겨주는 요양보호사다.
취재차 방문했을 때도 쌀쌀한 날씨였지만 남 할머니는 아침 8시부터 집 앞 의자에 몸을 기대 요양보호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담배 한 모금으로 시간을 보내며 요양보호사를 기다린다는 남 할머니.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에 남 할머니의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 (와 줘서) 고마워 고마워.”
회원들과 직접 담근 열무김치와 밑반찬을 챙겨주기 위해 동행한 김미영 한국생활개선광주시연합회 남한산성면 회장이 남 할머니의 속사정을 대신 전해줬다.
“집이 동네 끝자락이라 사람이 거의 오질 않아요. 종일 여기 의자에 앉아 지나가는 차들만 하염없이 보세요. 바깥분과 사별한 지 오래됐고, 주말에 자손들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시죠.”
빨랫줄에 잘 말려진 시래기와 집 앞 소담하게 꽃을 피운 백합은 찾는 이가 드물어 사람을 그리워하는 할머니의 마음이 담겨있는 듯 했다.
“늙으면 죽어야지”가 말버릇
대개 농촌마을에서 아흔을 넘은 할머니를 보는 일은 드문 일이 아니다. 충남 홍성군 광천면 공수마을 이모 할머니(97)는 백수를 앞두고 있다. 몇몇 자식을 앞세우고 손자와 노년을 보내고 있다. ‘늙은 게 죄지’, ‘늙으면 죽어야지’가 말버릇인 이 할머니지만 하루가 멀다 하게 이웃들이 찾아올 때면 얼굴에 웃음꽃이 핀다고. 그만큼 사람 오는 일 자체가 할머니에게 위로가 되고 있었다.
5켤레 양말과 커피믹스와 간단한 간식거리를 챙겨온 김양순 한국생활개선홍성군연합회장과 회원들에게 이 할머니는 연신 고마움을 표하며 눈물을 보이기까지 했다.
“양말 하나씩 노놔 가져.”
마치 손자를 보듯 따뜻한 눈빛이 가득한 할머니의 마음 씀씀이가 가슴에 와 닿았다. 여느 농촌의 아낙네들처럼 고된 농사일로 수십년을 보내며 몸도 망가졌다. 그래도 또래보다 건강한 편이라는 할머니에게 예전엔 마을회관에서 이웃들과 화투를 치는 게 큰 즐거움이었다.
코로나19 탓에 바로 코앞인 마을회관 출입이 불가능해지면서 유일한 낙이 사라져 버리자 크게 낙담했다. 왠지 가족같이 지내던 이웃들과도 멀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TV에 더 의존하게 돼
바로 윗동네의 김모 할머니(93) 역시 아흔을 훌쩍 넘겼다. 몇 해 전까지 흙으로 지은 오래된 집에 살았지만 리모델링으로 안락한 집에서 생활하게 됐다. 비로소 편안한 노년을 보내게 된 것.
하지만 다리 힘이 약해져 거동하기 힘들어졌다. 그래도 코로나19 전에는 하루에 몇 번이고 마을회관을 본인 집처럼 드나들었다. 그만큼 편했고 소소하게 재미있는 일이 항상 있었다. 그러나 코로나19 이후 모든 게 달라졌다. 집 밖을 나갈 때면 애용하던 사발이로 불리는 전동 실버카는 어느새 낡아버렸다.
그 빈자리는 TV 시청이 대신하게 됐다. 원래도 TV 보는 일이 여가생활의 큰 비중을 차지했지만 코로나19 이후에는 더 의존하게 됐다. 특히 트로트 프로그램 시청은 이 할머니에게 가장 큰 즐거움이 됐다. 소리는 거의 들을 수 없지만 흥겨운 몸짓에 덩실덩실 춤을 따라 출 정도다.
“장민호랑 임영웅이는 잘 생겼대. 테레비에 더 자주 나왔으면 좋겄어.”
할머니를 흐뭇하게 하는 두 사람이 나올 때면 젊은 사람 못지않게 집중해서 본다고 이웃들은 입을 모은다. 할머니를 가장 웃음 짓게 하는 거의 유일한 존재들이다.
가족보다 더 가까운 이웃들 덕분에 버텨
김양순 회장은 혼자 지내는 어르신들을 위해 어버이날을 앞두고 분과회원들과 손수 만든 꽃바구니를 선물했다. 모두가 가족들과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낼 때가 할머니들에겐 가장 쓸쓸한 시간이 될 것 같은 생각에 회원들과 준비한 선물이다. 자그마한 선물도 중요하지만 시간 날 때마다 말벗이 돼 드리는 게 가장 좋은 효도라고 믿는다.
“우리 시어머니도 올해 93세예요. 그래서 더 마음이 쓰여요. 틈날 때마다 와 손잡아 드리고 제철나물로 만든 반찬을 챙겨드리고 있어요. 대단한 게 아니지만 그걸 가장 고마워하시죠.”
정부와 지자체가 해야 할 고령의 어르신을 위한 돌봄을 이웃과 단체들이 메우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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