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행인 칼럼

채 희 걸
본지 발행인

1950~60년대의 우리의 식량사정은 정말 취약했다. 당시 보리가 팰 무렵이 되면 춘궁(春窮)은 절정에 이르렀고 사람들은 굶어죽기까지 했다. 이때 신문들을 살펴보면 앞을 다투어 전국의 서럽고 슬픈 춘궁 실태를 스케치한 로뽀기사가 사회면의 전면을 뒤덮곤 했다.
때문에 식량증산은 국가 제1 순위의 과제가 됐고 볍씨소독부터 수확, 탈곡에 이르기까지 한 톨의 쌀이라도 더 생산하기 위해 벼 증산지도에 모든 국력이 집중될 정도였다. 당시 벼에 치명적인 피해를 주는 도열병과 벼멸구가 나타나면 농촌지도사들은 꼭두새벽부터 농촌마을로 달려나가야 했다. 우선 마을 이장댁을 찾아 앰프를 이용해 병해충 방제 정보 방송을 하고, 마을 곳곳을 돌며 병충해 방제 지도에 숨 돌릴 겨를도 없었다.
이런 활동중에 식당도 없는 벽촌에서 끼니때를 놓치면 근처 친밀히 지내는 농촌지도자의 빈집을 들렀다. 그리고 가마솥에 담긴 밥으로 대충 끼니를 해결하고 “형수님 ○○○지도사 밥 축내고 갑니다. 죄송합니다”라는 쪽지를 솥뚜껑에 붙여 놓곤 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저녁에는 학교 못가는 4-H 회원들을 모아 야간학습 지도에 나서기 일쑤였다. 또한 농촌지도자 회원과 생활개선구락부원을 찾아 야간상담 등 실기교육과 사회교육 등 다방면의 지도역할을 하느라 분주하기 그지없었다.
요즘 그렇게 흔한 오토바이도 없이 자전거로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순회지도에 나서면서 식량증산에 온 몸을 다 바쳤다. 이런 농촌지도사들의 뜨거운 열정과 값진 땀의 결실은 5천년 역사에 길이 남을 식량자급 녹색혁명의 위업을 이루어 냈다. 
고달프고 힘들었지만 당시 농촌지도사들은 국민들로부터 큰 신뢰와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요즈음은 쌀이 넘쳐나 재고(在庫)가 쌓이면서 농촌지도사에 대한 예우와 농촌지도사업에 대한 관심이 많이 쇠퇴됐다.
그렇지만 이 시점에서 농촌지도사업에 대한 면밀한 조명·관찰과 앞으로 추진 진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생각해 보아야 한다. 현재 쌀 자급은 완전히 실현되었다. 그러나 농업인들 도시민에 비해 소득이 점진적으로 뒤져 격차 심화되어 가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라 외국의 농산물 물밀듯이 들어와 우리 농산물을 지키기에도 급박하다.
농사 여건과 기술도 상당히 진화·혁신되었다. 현재 60년대 당시로는 듣도 보도 못하던 파프리카, 허브, 브로커리 등 소득을 올릴 수 있는 농사작목이 250여 개로 크게 늘어났다. 농업인 생산보다는 오히려 가공, 포장디자인, 전자상 온라인거래 유통에 많은 신경을 써야 한다.
이래도 소득저조로 농사체험 관광까지 해야 할 딱한 사정에 와 있다. 영농영역과 과제도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농촌지도사업을 경시하거나 위축을 시켜선 절대 안 된다. 그러나 현재 시군농업기술센터의 조직이 농업 행정업무와 통합 운영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소장은 행정직으로 보임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행정사무관으로 보직하여 농촌지도사업의 쇠퇴를 가속시키고 있다. 이같이 농촌지도사의 승진기회 차단과 봉쇄로 사기침체 심각하다. 이런 일련의 농촌지도사업 후퇴 내지 실종시키는 시책 즉각 중단해야 한다. 농촌지도사업의 이같은 후퇴는 농업뿐만이 아니라 국력 저해 요인이 된다.
한편에선 농촌지도사들이 이메일이나 인터넷을 활용해 농촌지도를 하고 있으나 농업인들과의 빈번한 대면(對面) 지도에 적극 나서야 한다. 농민의 노령화로 컴퓨터 이용도는 저조한 편이다. 사람을 직접 만나는 소통하는 대면 상담지도는 따뜻한 인간관계를 형성함으로써 농민의 영농동기와 의욕을 크게 높여주고 지속적이고 발전적인 지도사업을 보장해준다.
농업은 선진국들도 절대 포기하지 않는 국가 기반산업이다. 잘 사는 나라일수록 농업보호 정책을 강력히 추진한다.  21세기에 부합하는 농촌지도사업을 새롭고 뜨겁게 점화(點火)시켜야 국가농업의 발전을 기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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