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자유인’으로 사는 소설가 박범신

 

아내는 세상에서 가장 확고하게 믿을 수 있는 여자

 

살 오르는 투명한 햇살과 쪽빛 하늘, 삽상한 바람이 가득 내려앉아 수런거리는 가을 캠퍼스. 밖엔 불안하고도 변화무쌍한 바람이 부는데 풀잎같은 여리디 여린 감성을 가진 작가는 혹 이렇듯 시절 좋은 캠퍼스 한 구석에서 퀭한 눈을 하고 쓸쓸하게 서성이고 있지는 않을까. 그러나 연구실에서 만난 그는 전에 없이 도회적인 젠틀한 모습으로 여유있게 담배를 피워 물고 있었다.

‘어머니’는 영원한 텍스트
“담배 아직 피우시네요?”
”허어, 내내 피우던 걸 어떻게 끊누…”
질리도록 해오고 들어온 문학얘긴 접기로 했다.
“요즘 엄마 신드롬으로 문학계가 떠들썩 한데 남자들이 더더욱 쓸쓸하게 생겼습니다.”(2005년도에 내놓은 그의 산문집 <남자들, 쓸쓸하다>에 빗댄 말이다)
그는 그렇지 않다며 정색을 했다.
“어머니는 예나 지금이나 영원한 텍스트지.”
누구나가 그렇겠지만 볼것 없는 시골에서 나고 자라 소설가의 길을 걸어온 그에게 어머니는 유난히도 각별한 존재였다고 했다. 그 어머니를 생각할 때가 있느냐고 물었다.
“나이 들고 늙어가면서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나. 나는 누나 넷을 위로 둔 외아들이었는데, 장돌뱅이로 떠돌던 아버지와는 아랑곳 없이 어머니가 내가 문학을 하는데 큰 자양분이 되었던 것 같아. 워낙에 강하면서도 예민하고 한없이 따뜻하고 뜨거운 분이었는데, 그러한 것들이 내게 예술적 자아와 감각에 눈을 뜨게 해 줬던 것 같아. 그야말로 세계는 불화로 가득 싸여 있는 것인데, 내 어릴적 우리 집이 그렇듯 가족간의 불화가 잦았지. 가난과 생활고 때문이었어. 그때 참 힘들었지만 그것을 숙명처럼 등에 걸머지고 그 불화 속을 헤쳐가신 그 어머니의 감수성과 뜨거운 사랑이 나의 문학을 있게 해 준 거라고 확신하고 있지.”
그 어머니가 자신이 인기작가로 올라서서 신문이며 방송 등 온 장안에 이름을 도배하다시피 하기 직전인 77년에 작고해 가슴이 아리다고 했다. 그의 어머니의 모습은 훗날 중앙일간지에 연재돼 낙양의 지가를 올렸던 그의 장편 <불의 나라>에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고향에는 가시나요?”
“이따금 독자들과 문학기행길에 찾아가곤 하는데 다 무너졌어. ‘소설가 박범신 생가’라는 표지판만 덩그러니 서 있지.”
그는 창가를 바라보며 씁쓰레하게 웃었다.

결혼, 리얼리즘 단계 잘 거쳐야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여름의 잔해>가 당선되어 등단한 그는 70년대에 그 특유의 감성이 녹아 있는 문체로 소외된 계층의 이야기를 주로 다루며 미학적 감동을 안겨 주었는데, 그의 소설미학을 한층 윤기나게 한 여성, 결혼, 아내는 그에게 어떤 것인가.
“오늘날을 사는 아내의 역할, 결혼생활에 대한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이혼율도 높고 황혼이혼도 전에 없이 쉽게 이루어지고 있는 세태이기도 한데…”
그는 거침없이, 그러면서도 논리정연하게 첫째 둘째 셋째 식으로 얘기를 풀어놨다.
“나는 결혼생활을 세단계로 나누는데, 그 첫번째 단계가 낭만주의 단계인 신혼시기지. 이때는 꽃한송이를 가지고도 사랑으로 화해를 할 수 있는 단계야.
그 다음은 리얼리즘 단계인데, 이 10~20년간이 가장 길고도 혹독한 시기이지. 싸움도 많이 하고… 서로가 책임을 다하면서 이 단계를 잘 견디고 살아내면 아름다운 노년을 보낼 수 있는 인간주의 단계로 넘어가게 돼. 이 때는 서로 적정선에서 양보하게 되고 때로는 상실감을 잘 견디게도 되지.”
“본인은 어떻다고 생각하시나요? 혹 세속적이긴 하지만 그럴싸한 사랑을 생각해 본 적은 없으신가요?”
“나…?! 아내가 옛 사랑이자 영원한 사랑이지. 낸들 왜 사랑을 생각해 보지 않겠나. 특히 나같은 자유인이 말야. 영원한 애틋한 사랑을 꿈꾸지. 그러한 아름다운 욕망은 곧 나같은 소설가에게는 커다란 창조적 에너지와 같은 거거든. 그렇지만 난 지금 행복해. 20대 때 생각하고 맹세했던 일- 죽을 때까지 소설 쓰겠다는 것과, 이 여자와 평생 연애하며 살겠다는 것을 지난 30여년 간 잘 지켜왔거든. 별 외도 않고 작가로 글 쓰기만 했고 작가의 길을 잘 지켜가고 있다고 자신 해. 그러니 행복한 거지.”

서로 확고한 믿음 가져야
“요즘 60~70대의 황혼이혼이 많습니다. 젊은 층의 이혼율도 증가하고 있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황혼이혼은 앞에서 얘기한 세 단계 중에 두번째인 리얼리즘 단계를 잘못 산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봐. 이혼이 늘어가는 것은 자본주의가 만든 세속적 욕망이 남편과 아내 둘 사이를 유린하기 때문이지. 믿음이 있어야 해. 나는 내 아내라는 여자 자체를 믿어. 세상에서 가장 확고하게 믿을 수 있는 여자라고 생각하고 있지.”
“그런 상황에서는 오래 살고 싶은 욕망이 강할 수 있는데…”
“나이를 이겨내려면 생노병사의 욕망을 자연스럽게 뛰어넘어야 해. 난 꼭 오래 살아야 겠다는 생각은 없고, 죽음 자체가 두렵지는 않지만 죽음에 이르는 고통스런 과정이 있을까봐 겁나. 졸지에 치매나 오고 주위 가족에게 씻기 어려운 고통을 안겨준다는 사실을 생각만 해도 끔찍해.”
그러면서도 이순(耳順)을 훌쩍 넘어선 그의 표정은 한없이 편안해 보였다. 2년 뒤의 정년퇴직도 그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는 물리적 외적 상황일 뿐이라고 했다. 더 이상의 큰 욕심이나 미련도 없다고 했다. 퇴직 후에도 평생을 변함없는 맹세처럼 지켜 온 글쓰기란 일이 있잖느냐고 오히려 반문 했다. 그렇잖아도 오는 10월부터는 온라인 매체에 노시인의 연애를 그린 소설을 연재할 예정이라고 귀띔했다.
그리고 그는 이 시대의 여성들에게 들려준 남자의 얘기를 담은 산문집 <남자들, 쓸쓸하다>에서처럼 오늘 아침도 이런 희망 메시지를 띄운다.

- 필요한 것은 남자와 여자가 더불어 함께 사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동류항으로 묶이면 서로 이해 못할 것이 없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든, 남편과 아내의 관계든 간에 최종적으로 우리가 만나야 할 지점은 인간의 자리이다. ‘거울 앞에 돌아온 내 누님같은 꽃’이 되어 만날 때, 그 눈물겹고도 따뜻한 자리에서 만날 때, 최종적으로 붙들어야 되는 이름은 인간 뿐이다. - 인간의 얼굴로 뒷받침 되지 않으면 사랑도 다 소용없다.

그가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기자에게 귀엣말처럼 한 마디 던졌다.
“박형, 꼬리 바짝 내려. 더 늙어서 마누라에게 밥이라도 얻어먹으려면…ㅋㅋ”


■소설가 박범신(朴範信)은…


1946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원광대와 고려대 대학원을 나왔고, 지금은 명지대 문예창작과 교수, 서울시문화재단 이사장으로 있다.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여름의 잔해>가 당선돼 등단한 이래 소설집 <토끼와 잠수함> <흰 소가 끄는 수레> <향기로운 우물이야기>와 장편소설<죽음보다 깊은 잠> <풀잎처럼 눕다> <불의 나라> <물의 나라> <침묵의 집> <더러운 책상> <외등> <나마스테> <촐라체> <고산자> 등을 펴냈다. 대한민국문학상(1981)·김동리문학상(2001)·만해문학상(2003)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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