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은 미 생활지도관
농촌진흥청 발효이용과

 

거의 30여 년 전 강원도 화천군농업기술센터에 근무했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홍천군에서 군 복무 중이던 두 살 아래인 사촌동생에게서 떡 좀 해서 면회 한번만 와 달라는 내용의 편지가 왔었다.
서울에서만 생활하다 직장 때문에 화천에 가서 홀로 자취를 했었던 철부지 어린 아가씨였었던 나는 군부대가 많았던 화천에서 자주 눈에 띈 군인들이 왠지 무섭게만 보이고 경계해야할 대상으로만 보였었다. 따라서 아무리 절친한 동생의 부탁이지만 동생의 부대를 처녀가 혼자 찾아간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 시절 강원도의 교통형편도 핑계를 댈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되었기에 동생의 그 간절한 부탁을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그만 외면하고 말았다.
한창 젊은 군인들의 식탐이 이해가 되었을 무렵에는 동생은 이미 사회인이 되었고 동생이 그때의 일을 기억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동생만 보면 그때 동생의 간절한 부탁을 외면한 내 철없음이 부끄럽고 후회가 되었었다.

 

 

세월이 한참 흘러 결혼을 하고 아들이 그 동생만큼 성장해 군대에 가게 되었고 아들도 동생과 똑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내왔다. 초코파이가 먹고 싶은데 보내주었으면 좋겠고 이왕이면 동료들과 같이 먹을 수 있게 많이 보내달라는….
20년의 세월이 떡을 초코파이로 바꾸어 놓았지만 떡이 먹고 싶었던 사촌의 마음과 초코파이가 먹고 싶은 아들의 그 간절함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일거라 생각했다.
이번만큼은 제대한 아들의 얼굴을 볼 적마다 후회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에 초코파이를 한 상자 가득 싣고 면회도 갔었고 여러 번 보내기도 했다.
동생만 보면 미안했던 기억 덕분에 아들은 포식을 했겠지만 지금도 가끔 떡과 함께 오버랩 되는 허기졌을 동생의 모습은 마음 한구석에 항상 미안함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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