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가 집안서 근대교육 받아 
교사로서 민족의식 일깨워
일제 탄압 피해 중국 망명 중
영원한 동반자 김규식과 혼인
애국부인회·대한적십자사 창립
​​​​​​​임시정부 지원한 ‘숨은 공신’

■ 운명을 개척한 여성들- ② 국내 잠입해 3·1운동 촉구한 김순애

1909년 6월 정신여학교 졸업 무렵, 젊은 시절의 김순애 선생(사진출처 : 독립기념관)
1909년 6월 정신여학교 졸업 무렵, 젊은 시절의 김순애 선생(사진출처 : 독립기념관)

“교육은 우리 민족의 생명이다. 교육이 있으면 살고, 교육이 없으면 죽으리니 장차 우리 민족이 흥왕할 길은 오직 교육이다. 대한의 동포여! 이후 사업은 오직 교육에 있는 것을 깨달을지어다.”
1920년 중국 상하이에서 김순애(金淳愛) 선생이 상하이인성학교 유지·발전 모금 취지서에 밝힌 신념이다. 선생은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나 부족한 것 없이 자랐음에도 일제 탄압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 임시정부의 숨은 조력자로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이자 민족교육가였다.
애국지사 김순애 선생의 독립을 향한 여정과 열정, 그 삶의 궤적을 따라가본다. 

3·1운동 도화선 ‘신한혁명당’ 유일 여성당원 
김순애 선생은 1889년 5월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성섬은 황해도를 대표하는 자산가였다. 일찍이 기독교를 수용한 선생의 아버지와 어머니 안성은은 4남4녀 자녀들 교육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였다. 이는 여섯째이자 둘째 딸인 선생이 중등교육을 받는 데 밑거름이 됐다. 선생은 고향에서 초등교육을 받은 뒤 상경해 정신여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부산으로 내려가 교사로 재직했다. 

넷째 오빠 김필순을 비롯한 형제들은 서울에서 많은 애국지사와 밀접히 교류했는데, 이 영향으로 선생은 우리 민족이 당면한 현실을 인식하고 강한 민족의식을 가지게 됐다. 

식민지 노예교육이 강화되자, 선생은 학생들에게 우리 역사와 지리를 비밀리에 가르치는 등 민족교육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일본 경찰에 체포될 위기에 처하자 1911년 12월 어머니, 김필순과 함께 만주로 망명했다. 

이후 상하이를 거쳐 1915년 9월 난징 명덕여자학원에 입학해 수학했다. 형부인 서병호의 중매로 평생 동지인 김규식(金奎植)과 1919년 1월 결혼한다. 

김규식은 김순애 선생의 정신여학교 동창인 조은수와 결혼했지만, 사별한 처지였다. 부부는 곧바로 상하이로 근거지를 옮겨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으로 당시 국제정세는 요동치고 있었다. 앞서 1918년 8월 여운형·조소앙·김철·서병호 등은 상황을 주시하면서 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당’을 조직했다. 부부는 망설임 없이 가입·활동에 나섰다. 선생은 신한청년당의 유일한 여성당원이었다. 이때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신한청년단은 강화회의에 파견할 대표로 김규식을 선정했다. 

출국 전 김규식은 신한청년당 당원들에게 “파리에 파견되더라도 서구인들이 내가 누군지 알 리가 없다. 일제의 학정을 폭로하고 선전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국내에서 독립을 선언해야 한다. 파견되는 사람은 희생당하겠지만 국내에서 무슨 사건이 발생해야 내가 맡은 사명이 잘 수행될 것이다”라며 국내 독립 시위를 주문했다. 이 주문은 3·1 운동이 벌어지는 계기가 됐다. 

남편이 출국한 뒤 선생은 선우혁·김철 등과 국내에 잠입, 독립운동 전개와 독립자금 지원 요청 임무를 맡아 수행했다. 대구에서 2·8독립선언 열기를 전파하던 조카 김마리아를, 광주에서 동생 김필례 부부를 만나는 등 3·1운동을 촉구하는 힘겨운 여정에 나섰다.

참다운 교육가…외국어와 변장에도 능했다
서울에서 만난 종교인이자 독립운동가였던 함태영은 선생에게 “그러다 잘못되면 파리에 가 있는 남편 김규식의 사기에 영향을 미칠 것이고, 그러면 민족의 대업 완수에 지장이 있을 것”이라 설득했다. 김순애 선생은 3·1운동을 목전에 두고 다시 상하이로 떠났다. 

2월28일 중국인으로 변장하고 평양을 거쳐 압록강을 건넌 선생은 헤이룽장성에서 병원을 개설하고 활동 중이던 오빠 김필순을 찾아갔다. 선생은 그곳에서 독립만세시위운동 계획을 추진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됐으나 중국 관원의 도움으로 탈출했다. 

3·1운동의 성공 배경에는 김순애 선생 가문이 있었다. 국내외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활약을 펼친 대지주·독립운동·신앙 명문가였다. 

상하이로 돌아간 김순애 선생은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했다. 회장으로 선출돼 선전활동과 독립자금 모금에 전력을 기울였다. 1920년 1월에는 무장투쟁 성격을 띤 임시정부 외곽단체 ‘의용단’을 조직했다. 같은 시기 ‘대한적십자사’를 조직해 간호원양성소를 열어 독립전쟁에 필요한 의사 양성을 지원하기도 했다. 1926년에는 안창호 등과 함께 ‘임시정부경제후원회’를 발족해 임시정부 자금 지원에 힘썼다.

1943년 2월에는 충칭 각계 부인 50여명과 함께 ‘대한애국부인회재건대회’를 개최했다. 선생을 주석으로 추대한 부인회는 선언문을 발표하고 7개 항의 남녀동권향유강령을 발표했다.

“국내외의 부녀는 총단결해 전 민족해방운동을 추진하되 남녀 간에 평등한 권리와 지위를 향유하는 민주주의 공화국 건설에 적극 참여하고….”

1919년 1월19일 중국 상하이에서 촬영한 김순애 선생과 김규식의 결혼기념 사진(사진출처 : 독립기념관)
1919년 1월19일 중국 상하이에서 촬영한 김순애 선생과 김규식의 결혼기념 사진(사진출처 : 독립기념관)

선생은 광복을 맞은 후 조국의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귀국한 뒤로는 통일된 대한민국 수립운동에 참여했다. 1946년에 모교인 정신여자중·고등학교 재단이사장, 1948년에는 평이사로 활동했다. 

김규식이 납북되자 정계를 은퇴하고 남편의 생사를 알아보기 위해 온 힘을 쏟았다. 김규식은 1950년 6·25전쟁 중 북한군에 납치돼 그해 12월10일 평안북도 만포진 부근 별오동에서 70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다. 

김순애 선생은 1962년 평이사도 사임했다. 재임 중에도 독립정신을 강조하는 참다운 교육가였다. 

1976년 5월17일 87세에 영면했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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