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 때 작곡가 이봉조 만나
영화 ‘안개’ 주제곡 불러 히트
콤비 이뤄 국제가요제 출전
‘꽃밭에서’ 등 불러 최고가수상
​​​​​​​1970년대 ‘국가대표 가수’ 쾌거

■ 박해문 음악감독의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디바’

1969년 3월5일 발매된 정훈희 스테레오 하이라이트 앨범. 정훈희는 1951년 5월11일 부산에서 태어났다. 피아니스트였던 아버지 정근수와 밴드 히식스 멤버로 활동한 바 있는 기타리스트 큰오빠 정희택 등 음악과 인연이 깊은 집안에서 자라면서 가수의 꿈을 키웠다.
1969년 3월5일 발매된 정훈희 스테레오 하이라이트 앨범. 정훈희는 1951년 5월11일 부산에서 태어났다. 피아니스트였던 아버지 정근수와 밴드 히식스 멤버로 활동한 바 있는 기타리스트 큰오빠 정희택 등 음악과 인연이 깊은 집안에서 자라면서 가수의 꿈을 키웠다.

“쪼맨한 가시나가 건방지게 노래 잘하네”
‘나 홀로 걸어가는 안개만이 자욱한 이 거리 그 언젠가 다정했던 그대의 그림자 하나 생각하면 무엇하나 지나간 추억 그래도 애타게 그리는 마음 아~ 아~ 그 사람은 어디에 갔을까 안개 속에 외로이 하염없이 나는 간다~.’

정훈희의 ‘안개’는 국내 대중가수로는 최초로 국제가요제에서 수상한 곡이다.

1967년, 서울 그랜드호텔 나이트클럽. 부산에서 올라온 고등학생 정훈희는 당시 클럽 밴드마스터였던 삼촌을 졸라 연습 삼아 팝송 몇 곡을 흥얼거렸다. 그때 나이트클럽 옆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작곡가 이봉조가 정훈희의 목소리에 끌려 그곳으로 내려왔다.

“쪼맨한(조그마한) 가시나가 건방지게 노래 잘하네.” 당시 이봉조는 ‘안개’를 만들어 놓고 자신의 색소폰 연주로 취입한 상태였으나, 노래에 맞는 목소리를 찾고 있었다. 정훈희-이봉조 콤비는 이렇게 탄생했다.

며칠 뒤 정훈희는 영화 ‘안개’ 주제곡을 녹음했다. 김수용 감독이 연출한 신성일·윤정희 주연의 영화 ‘안개’가 흥행하면서 데모 앨범에 불과했던 정훈희의 ‘안개’도 방송가에 신청곡 요청이 넘쳐났다. 팝 스타일의 멜로디와 여운이 서린 노랫말, 정훈희의 비음이 섞인 고운 음색과 탁월한 가창력이 빚은 결과였다.

방송 관계자들의 성화와 신세기레코드사의 발 빠른 움직임으로 그해 정훈희의 데뷔 앨범 ‘안개·숙명’이 발매됐다. ‘낙엽’ ‘내 마음 나도 몰라’ 등 정훈희가 녹음한 5곡을 포함해 총 12곡을 수록한 컴필레이션 앨범이다.

고등학교 1학년, 16세 소녀는 가수의 꿈을 이뤘다. 정훈희는 ‘안개’로 1967년과 1968년 신인상을 휩쓸며 가요계 신데렐라가 됐다. 여세를 몰아 정훈희-이봉조 콤비는 1970년 제1회 도쿄국제가요제에 출전, ‘안개’로 ‘베스트10’에 뽑혔다.

‘국가대표 가수’ 정훈희는 이후에도 1972년 아테네국제가요제에 출전, 곡 ‘너’로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수상했으며, 1975년 칠레가요제에서는 곡 ‘무인도’로 3위 입상과 최고가수상을 동시에 받았다.

“그 7년이라는 세월이 악몽 속이었다” 
하지만 1975년, 한 스토커에게 시멘트 조각으로 얼굴이 피습당하는 사건에 이어 대마초 파동에 연루돼 방송 출연이 정지되는 아픔을 겪었다.

정훈희는 그냥 담배를 피웠을 뿐, 명백한 증거도 없이 대마초 혐의가 씌워졌다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모발 검사 등의 조사를 하던 시절이 아니었다. 의혹은 곧 혐의가 됐다. 훈방 조치되긴 했으나, ‘대마초 가수’라는 낙인으로 인해 활동이 쉽지 않았다.

‘안개’의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여러 번 재발매된 정훈희의 데뷔 앨범. 재킷 사진은 영화 ‘안개’의 한 장면이다.
‘안개’의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여러 번 재발매된 정훈희의 데뷔 앨범. 재킷 사진은 영화 ‘안개’의 한 장면이다.

이후 이봉조-정훈희 콤비는 1979년 칠레가요제에 출전,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꽃밭에서’를 스페인어로 번안한 ‘Un D′la Hermoso Como Hoy’(오늘처럼 아름다운 날)을 불러서 최고가수상을 수상한다.

당국에서는 ‘국위를 선양한 대마초 연예인에 대해서는 선처를 베풀 것’이라고 했고, 정훈희의 칠레가요제 실황 필름이 전국에 방송됐다.

1980년, ‘꽃밭에서’를 타이틀로 한 ‘너 하나 때문에’ 앨범을 발표하고 재기에 나섰다. 제2의 전성기를 맞았으나 이후로는 정규앨범을 내지 않았다.

정훈희는 “죽기 살기로 노래해도 사소한 것으로 버림받는다는 좌절감과 섭섭함 때문이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다시 활발한 방송 활동을 하기까지 7년이 걸렸다. 정훈희는 “그 7년이라는 세월이 정말 악몽 속이었다”고 고백했다.

그래서였을까. 1980년대, 한창 활동하던 시기에 가수 김태화와 2세 소식을 알리며 무대와 멀어졌다. 1989년에 김태화와 ‘우리는 하나’ 앨범을 냈고, 2008년에는 아주 오랜만에 데뷔 40주년 기념 독집 앨범을 발매했다.

두 아들 유진과 진성은 가수 김대한, 김민국으로 활동하며 정훈희와 함께 음원 ‘우리집 하루’를 발매하기도 했다.

서구적인 미모의 발라드 가수 정훈희는 최근까지도 왕성한 활동을 잇고 있다.

박해문 음악감독은 대중음악 작곡가, 프로듀서, Seagate_DJ로 활동 중이다. 한·중 합작 팩츄얼 드라마 ‘임진왜란 1592’, JTBC 드라마 ‘나의 나라’ 음악 등을 만들었다.
박해문 음악감독은 대중음악 작곡가, 프로듀서, Seagate_DJ로 활동 중이다. 한·중 합작 팩츄얼 드라마 ‘임진왜란 1592’, JTBC 드라마 ‘나의 나라’ 음악 등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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