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독립과 결혼…평생 공부
항일 민족운동에 헌신하며
대한민국애국부인회장 활동
임시정부에 군자금 모금·지원
모진 고문에도 당당히 맞서

■ 운명을 개척한 여성들- ① 2·8 독립선언 기운을 전파한 김마리아

미국 파크대학 시절의 김마리아 선생(사진출처 : 독립기념관)
미국 파크대학 시절의 김마리아 선생(사진출처 : 독립기념관)

“독립이 성취될 때까지 우리 자신의 다리로 서야 하고 우리 자신의 투지로 싸워야 한다.”
독립기념관 비석에 새겨진 순국선열 김마리아(金瑪利亞) 선생의 어록이다. 선생은 2007년 지폐의 초상 후보로 거론되면서 세상에 알려진 독립운동가다. 당시 여성단체가 제시한 여성인물 후보 6명 중 한 명이었다. 
3·1 만세운동의 주역으로, 1919년 2·8 독립선언서를 기모노 속에 감추고 일본에서 한국으로 잠입, 전국에 배포해 3·1 운동의 불씨를 지폈다.
도산 안창호는 김마리아 선생에 대해 “그 같은 여성동지가 10명만 있었다면 대한민국은 독립했을 것이다”라고 했다.
꿈을 실현하는 데 한 점 부끄러움이 없었던 김마리아 선생이 살아온 인생을 따라가본다.

애국지사 집안서 애국자로 성장
선생은 1892년 황해도 장연의 지주인 아버지 김윤방과 어머니 김몽은의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세례명이기도 한 이름 ‘마리아’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아버지가 지었다. 김윤방은 고향 마을에 초등학교(소래보통학교)와 교회를 세운 선각자였는데, 안타깝게도 선생이 어릴 때 숨졌다.

선생이 소래보통학교를 졸업할 무렵 어머니 또한 여의고, 숙부들의 슬하에서 자라게 된다. 안창호와 결의형제를 맺고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벌였던 김필순은 선생의 셋째 삼촌이다. 김규식의 아내이자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펼쳤던 김순애는 선생의 둘째 고모다.

소래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선생은 집에서 한학을 배웠다. “반드시 대학 공부까지 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언니 함라, 미렴과 같이 1905년 상경했다. 서울 세브란스병원에 근무하던 삼촌 김필순의 집에 기거하면서 정신여학교에 다니다 1910년 6월 졸업했다.

이후 2년 동안 전남 광주 수피아여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다, 모교인 정신여학교로 전근한 뒤 이듬해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여자유학생들과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를 조직하고, 1918년 동경유학생 독립단에 가담해 황에스더 등과 교류했다.

1919년 2·8 독립선언에 참여했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조사를 받은 뒤 풀려났다. 풀려난 직후, 일본에서도 한복만 입던 선생은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해 기모노를 입었다. 독립선언서 10여장을 베껴 기모노 허리춤에 숨긴 채 동료들과 부산으로 들어왔다.

“김마리아가 천도교 본부 및 보성사를 찾아와 동경 한국인 남녀 학생의 구국열의 근황을 술회하고, 본국에서도 거국적인 운동을 할 것을 힘써 권유했다. 나는 김마리아에게 우리들도 이미 계획 중이며, 또 지난 갑인년(1914) 이래 민중이 함께 일어나 일제의 질곡을 벗어나려고 암암리에 모색해 왔다고 하니, 김마리아는 천도교의 원대한 이념을 격려하며 기뻐했다.”

보성사의 사장으로 독립선언서 인쇄와 배포 책임을 맡았던 이종일은 그의 비망록에 김마리아 선생에 대해 이같이 기록했다.

광복 전 대한독립의 별이 되다
선생은 황해도 봉산에서 활동을 마치고 모교를 찾아갔다가 3월5일 일본 경찰에게 체포됐다.

석방된 후 9월에 애국부인회를 대한민국애국부인회로 개편해 회장이 됐다.

“옛말에 이르기를 나라를 내 집같이 사랑하라 했거니와 가족으로서 제 집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 집이 완전할 수 없고, 국민으로서 제 나라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 나라를 보존하기 어려운 것은 아무리 우부우부(愚夫愚婦)라 할지라도 밝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아! 우리 부인도 국민 중의 일분자다. 국권과 인권을 회복할 목표를 향해 전진하고 후퇴할 수 없다. 국민성 있는 부인은 용기를 분발해 그 이상에 상통함으로써 단합을 견고히 하고 일제히 찬동해 줄 것을 희망하는 바다.”

원산의 마르다윌슨신학교에서 강의하던 시절의 김마리아 선생(앞줄 왼쪽 첫 번째, 사진출처 : 독립기념관)
원산의 마르다윌슨신학교에서 강의하던 시절의 김마리아 선생(앞줄 왼쪽 첫 번째, 사진출처 : 독립기념관)

1919년 9월 선생이 작성한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취지서 중 일부다.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모금, 지원하면서 여성들도 항일독립 투쟁에 적극 참여할 것을 독려하던 중 11월 말 다시 붙잡혔다. 

이때 모진 고문으로 평생 고생하게 된다. 여러 고문 중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대나무 작대기로 머리를 때리는 것이었다. 똑같은 간격으로 머리를 때리는데, 폭언하면서 피가 나지 않게 기술적으로 계속 때리는 것이었다. 이로 인한 후유증으로 코와 귀에 고름이 잡히는 메스토이병에 걸려 평생을 심한 두통과 신경쇠약증에 시달렸다.

재판에서 3년형을 선고받았지만 고문 후유증이 심해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던 중 감시를 피해 탈출한 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한다.

중국에서도 난징대학교에 입학해 공부를 계속하는 동시에 상하이대한애국부인회 간부와 의정원 의원 등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에 힘썼다.

하지만 당시 임시정부는 파가 갈려 내부 혼란을 겪고 있었다. 이에 실망한 김마리아 선생은 1923년 6월21일 미국 유학을 위해 상하이를 떠났다. 파크대학, 시카고대학원, 뉴욕신학교 등에서 수학하면서 정진했다. 한편으로는 1928년 황에스더, 박인덕 등과 근화회(槿花會·재미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결성해 꾸준히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1933년 귀국, 당시 강원도 원산의 마르다윌슨신학교에 부임해 신학을 강의하면서도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민족의식 고취에 열정을 쏟았다. 고문 후유증이 재발해 평양기독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선생은 치료를 받았지만 끝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44년 3월13일 별세했다.

임종 직전에 “화장해서 대동강 물에 뿌려 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선생의 수양딸인 배학복은 숭고한 뜻을 따랐다.

정부는 김마리아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일생을 공부와 항일 민족운동에 헌신한 김마리아 선생의 정신은 오늘날까지 빛을 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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