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스탠더드 팝 영향
주류 흐름서 트로트 쇠락
동명의 영화 ‘동백아가씨’
주제가 불러 ‘스타’ 반열
35주 연속 1위, 25만장 판매 
​​​​​​​왜색 논쟁에 금지곡 아픔도

■박해문 음악감독의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디바’

‘천재 작곡가’로 불리던 박춘석과 ‘국보급 구성진 음색’의 이미자가 만나면서 ‘흑산도 아가씨’ ‘섬마을 선생님’ ‘기러기 아빠’ 등 히트곡들이 줄줄이 나왔다.
‘천재 작곡가’로 불리던 박춘석과 ‘국보급 구성진 음색’의 이미자가 만나면서 ‘흑산도 아가씨’ ‘섬마을 선생님’ ‘기러기 아빠’ 등 히트곡들이 줄줄이 나왔다.

히트곡마다 금지곡의 굴레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아가씨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 

1960년대 큰 인기를 얻었던 백영호 작곡, 한산도 작사, 가수 이미자가 부른 ‘동백아가씨’의 노랫말이다. 

1960년대 초 한국 대중가요는 패티김, 한명숙 등 미국 스탠더드 팝 경향의 가수와 작품이 대중가요의 바람을 일으켰다. 서구식 산업화·도시화를 향한 동경과 희망이라는 시대상이 이들 노래에 담겼다. 

이 기간 트로트는 침체기를 겪고 있었다. 트로트의 부활을 알린 곡이 바로 ‘동백아가씨’다. 

1963년 동아방송의 라디오 드라마 ‘동백아가씨’의 리메이크 영화인 신성일·엄앵란 주연의 ‘동백아가씨’(1964) 주제가다. 드라마와 영화 모두 남쪽 섬마을의 처녀가 서울에서 내려온 대학생과 사랑해 미혼모가 되고, 재회·이별하는 내용이다. 

가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신파 요소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1960년대 후반 가수 이미자를 일약 스타의 반열에 올려놨다. 국내 가요 35주 연속 1위를 기록했고, 25만장 음반 판매라는 엄청난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1965년 5개 방송국에서 왜색가요 정화 움직임이 일었다. 1968년 들어 왜색을 이유로 방송금지가 되고 음반 발매에도 제동이 걸렸다. ‘동백아가씨’는 1975년 6월 정부의 ‘공연활동의 정화정책’에 따라 공식적인 음반 금지곡이 됐다. 뒤에 나온 ‘섬마을 선생님’(1967년)과 ‘기러기 아빠’(1975년)도 금지곡이 됐다. 

트로트 정착하는 데 중심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동백아가씨’ 등이 방송과 음반 모두에서 해금됐고, 이미자의 대표곡으로서 음반과 공연 등으로 다시 대중의 품으로 돌아왔다. 

큰 인기에 힘입어 당시 여러 차례 ‘동백아가씨’ 음반이 재발매됐다.
큰 인기에 힘입어 당시 여러 차례 ‘동백아가씨’ 음반이 재발매됐다.

이미자는 일본 엔카풍의 노래를 많이 불렀다고 볼 수 있다. ‘동백아가씨’ 역시 단조의 트로트로 당시 엔카에서 많이 썼던 ‘라시도미파’의 5음계에 2/4박자 형식을 취했다. 1966년 ‘동백아가씨’가 일본에서 일어로 취입되고 방송되는 등 한일수교의 문화적 상징으로 부상한 이유이기도 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애창곡이 ‘동백아가씨’라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하지만 ‘동백아가씨’는 왜색 논쟁과 상관없이 향후 우리나라에 트로트가 정착하는 데 중심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미자가 발매한 노래는 히트곡만 400곡 이상이라고 한다. 베스트 앨범을 포함해 몇 장의 앨범이 발매됐는지 이미자 본인도 모를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1990년 한국에서 가장 많은 음반과 노래를 취입한 가수로 기네스북에 등재될 당시 그때까지 음반 560장에 2천여 발표 곡으로 집계됐다. 

때는 1989년, 데뷔 30주년 기념을 준비하고자 서울 세종문화회관 문을 두드렸을 때, 이미자는 거절을 당했다. 이미자의 공연이 ‘고무 신발 착용자’를 불러들여 세종문화회관의 명성을 떨어뜨린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에 이미자는 당시 관선 서울시장 고건에게 이 사실을 하소연했고, 결국 여야 4당대표 부부 등 저명인사들 앞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여기서 ‘고무 신발 착용자’는 농촌 노인과 여성으로 여겨졌다. 

1967년 ‘엘리지의 여왕’ 발표
1941년 서울에서 2남4녀 중 장녀로 태어난 이미자는 1943년 아버지가 일본 강제 징용에 끌려가면서 외할머니 댁에서 형제들과 떨어져 살면서 어렵게 지냈다. 

평소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이미자는 1957년 KBS 노래자랑 프로그램 ‘노래의 꽃다발’에서 1등, HLKZ-TV ‘예능 로타리’에서 입상하며 나화랑 작곡가에게 스카우트되면서 가요계에 데뷔했다. 

1959년 ‘열아홉 순정’, 1963년 ‘님이라 부르리까’, 1964년 ‘여자의 일생’ 등 발표하는 노래마다 사랑을 받았다. 

가수로서 이미자는 1965년 작곡가 ‘박춘석’을 만나면서 도약의 계기를 마련한다. 국민가수 이미자의 이름 앞에 늘 따라다니는 수식어 ‘엘레지의 여왕’은 1967년 박춘석이 작곡한, 이미자를 위한 동명의 영화 주제가를 수록한 음반 ‘엘리지의 여왕’이 발표되면서 생겨났다. 엘레지는 ‘슬픔을 노래한 곡’이다. 

이미자는 지난 2019년 2월 데뷔 60주년 기자회견에서 “‘이미자 노래는 질이 낮다’ ‘천박하다’ ‘술집에서 젓가락 두드리며 부르는 노래’라는 꼬리표가 있었다”며 “그런 소외감에서 힘들었지만 잘 지탱해왔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 바 있다. 

2023년 10월21일, 대중음악인 최초로 금관문화훈장을 수훈했다. 

박해문 음악감독은 대중음악 작곡가, 프로듀서, Seagate_DJ로 활동 중이다. 한·중 합작 팩츄얼 드라마 ‘임진왜란 1592’, JTBC 드라마 ‘나의 나라’ 음악 등을 만들었다.
박해문 음악감독은 대중음악 작곡가, 프로듀서, Seagate_DJ로 활동 중이다. 한·중 합작 팩츄얼 드라마 ‘임진왜란 1592’, JTBC 드라마 ‘나의 나라’ 음악 등을 만들었다.

 

 

저작권자 © 농촌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