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해방둥이 전쟁 겪어
가난하고 배고픈 어린 시절 
5·16에 12·12 등 격동기 지나
자식 낳아 어떻게든 교육시켜
요즘 젊은 세대 인내심 부족
​​​​​​​건강 허락하는 한 연기할 것 

■만나봅시다- 속정 깊은 우리네 아버지, 배우 박인환이 마주한 요즘 시대상

지난봄, 배우 박인환은 WAVVE 오리지널 드라마 ‘박하경 여행기’에 ‘꼰대 할아버지’로 등장해 열연을 펼쳤다. 박하경 여행기는 박하경으로 분한 배우 이나영의 명랑 여행기. 예상치 못한 순간과 기적 같은 만남을 그린 작품이다.
박인환은 한 버스터미널에서 TV를 보다 말고 듣는 이가 있든 없든 ‘요즘 젊은 것들’에 대해 일장 연설을 쏟아낸다. 참다못한 이나영이 요즘 젊은 것들을 대변해 조곤조곤 따져 묻는데, 박인환은 혀를 차는 것도 모자라 “결혼은 했냐, 자식은 낳았냐”고 고함친다. 결국, 말문이 막힌 박인환을 구해준 건 출발시간이 다 된 버스.
아뿔싸! 박인환과 이나영은 같은 버스에 올랐다. 또박또박 말대꾸를 하던 이나영은 박인환과 같은 연배인 아버지와 통화를 한 뒤 회한의 눈물을 흘린다. 버스에서 내린 이나영이 박인환 ‘선생님’께 정중히 사과하고, 박인환은 ‘갑자기’ 김부각을 건네는 것으로 마무리.
6·25 전쟁과 격동기 대한민국의 지난한 세월을 겪어 온, 1945년 해방둥이 배우 박인환을 만났다. 

배우 박인환은 딸들의 성화에 시달리다 담배를 끊은 지 오래다. 두 딸이 “왜 아빠만 생각하느냐”고 몰아세우는데, 배겨 내지 못했다고. MBC 드라마 ‘상도’ 촬영이 한창일 때였다. 그는 “아내하고 말싸움하면 이길 수 있는데, 딸들이랑 합세하면 이길 재간이 없다”고 ‘딸바보’ 면모를 보였다. 
배우 박인환은 딸들의 성화에 시달리다 담배를 끊은 지 오래다. 두 딸이 “왜 아빠만 생각하느냐”고 몰아세우는데, 배겨 내지 못했다고. MBC 드라마 ‘상도’ 촬영이 한창일 때였다. 그는 “아내하고 말싸움하면 이길 수 있는데, 딸들이랑 합세하면 이길 재간이 없다”고 ‘딸바보’ 면모를 보였다. 

성질부리고 고함치고 무뚝뚝하고
“박하경 여행기? 하도 많이 하니까… 몰라요. 정확히 뭐라고 했는지. 이나영에게 소리만 질렀지요. 하하하.” 

굳게 다문 입술과 곧은 인중은 배우 박인환이 맡아 온 고집스런 우리네 아버지의 영락없는 표정이다. 하지만 반듯한 이마 아래 간간이 보여주는 햇발 같은 눈웃음은 예의 우리네 아버지도 희로애락을 낯빛에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을 일깨운다. 

“요즘 젊은이들에 대해 나이 든 사람들의 생각은 비슷하지 않을까요. 나라 걱정에 먹고사는 문제에…5·16과 12·12, 베트남전쟁도 그렇고요. 전쟁은 다시는 일어나면 안 된다는 것을 우리 세대는 바탕으로 깔고 있지요. 가난했잖아요. 잘살아야 했지요. 그 과정에서 새마을운동이 기회가 되었지요. ‘박정희는 독재자다, 친일파다, 뭐다’ 그러면서 나쁜 쪽으로만 말하지만, 요즘 들어 이승만 전 대통령이나 박정희 전 대통령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고 있잖아요.”

중국을 바라보는 시각도 마찬가지다. 중국과의 외교가 중요하다고 말이 많지만, 분단국가의 아픔에는 중국(당시 중공)의 개입이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이후 대만하고 가깝게 지냈지만, 중국과 수교하면서 대만 사람들과 멀어졌다. 하나의 중국인가, 두 개의 중국인가. 박인환의 반문은 계속된다. “친중파라고 내몰리는 지도자는 왜 없을까요?” 

“역사를 한 발짝 더 들여다보면 친일파다, 친미파다 나누고 몰아세우는 것도 우스운 거예요. 요즘 젊은이들은 배고픈 게 뭔지 몰라요. 그래서 인내심이 부족하지요. 사실, 우리 애들도 이런 얘기를 하면 ‘왜 그래야 하냐’고 되물어요. 우리 때는 먹고사는 게 제일 중요하니까 자식을 낳으면 어떻든지 교육시키고 잘 가르치려고 했지요. 나는 굶더라도, 열심히 두 배 세 배 일을 했다고요.”

배우 박인환의 일상도 그가 그린 수많은 작품 속 우리네 아버지와 같다. 속정은 깊지만, 살갑게 드러내지 않는다. 한눈팔지 말고 올곧게 걸으라며 성질부리고, 고함친다. 

“고집도 있고, 화도 잘 내고, 자상하지도 않고 무뚝뚝하지요. ‘남자가 부엌을 어떻게 들어가냐’고. 지금 그렇게 하면 왕따 당하지요. 하하하.”

연기자 도약 계기 ‘왕룽일가’ 
연극영화과, 신문방송학과가 막 생기기 시작한 1960년대,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를 나왔다. 영화가 붐이 일었을 때라 전망이 좋다고 여겼다. 

“한번 해보자”고 동네 친구 대여섯 명이 우르르 시험을 쳤는데 박인환만 붙었다. 따로 연기를 배운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연극영화과를 나왔다고 다 배우가 되고, 연출이 되는 건 아니었다. 졸업 뒤에는 스태프라도 하려고 극단에 들어가서 연극을 했다. 

“아내는 잡지사 기자였어요. 결혼을 하고 나서 살림하라고 돈이란 걸 갖다 준 적도 없는 데다 연극하는 동료들을 집에 데리고 가서 술도 많이 마셨지요. 아내가 늦은 밤 술상 차리고, 다음날 일찍 밥상 차리고 출근하기를 1년 동안 했지요. 어느 날 ‘더는 못하겠다’고 회사를 그만뒀어요.”

가난한 연극을 하면서도 술 한잔에 시름을 잊었는데, 갑자기 경제적인 문제가 커지면서 연극만을 고집할 수 없게 됐다. 버스를 세 번이나 갈아타고 경기도 의왕으로 연기 지도를 하러 다녔다. 정교사 월급이 40만원일 때, 그는 20만원을 받아 생계를 꾸렸다. 같은 연극배우 출신 오현경은 화술을, 박인환은 워크숍 작품을 지도하는 계원예술고등학교 시간강사였다.

그러다가 돈이 되는 방송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연줄로 얻은 첫 배역은 죽을 쒔지만, 버스 승객3 등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해 방송 환경에 적응해 나갔다. 단막극, 8·15 등 특집극 등에 얼굴을 알리다 보니 미니시리즈 등에도 선택이 됐다. 

“‘연극으로 다져진, 개성이 강한 연기자가 드라마에서 다양한 인물을 표현한다’고 하면서 주목을 받았지요.”

연기자로서 도약의 계기는 처음으로 주인공 역을 맡은 KBS 미니시리즈 ‘왕룽일가’. 1989년 방영된 이 작품에서 박인환은 우묵배미 마을의 고집쟁이 ‘왕룽’ 자체였다. 도시화의 바람을 타고 어쩔 수 없이 의식의 변화와 삶의 변질을 겪는 농촌사회의 현실, 왕룽일가는 시대상을 반영한 농촌드라마로 선풍을 일으켰다. 

하지만 박인환에게 황금빛 들녘이나 서산 너머 붉은 노을 풍경은 교과서에나 나오는 문학적이고 서정적인 농촌의 풍경일 뿐이다. 검정고무신에 달랑 책보 하나, 춥고 배고팠던 충북 청원(현 청주) 남일면 어린 시절은 그저 가난이라는 고달픈 점철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그 안에 시골 출신이라는 흔적은 남아 있다. 정서적으로 정에 약하고, 모질지 못하다. 

“나이가 드니까 일은 많이 주어지지 않지만, 연기자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해야지요. 내년 1월쯤 새 작품에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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