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도 꿈나무, 요릿집 ‘한국관’ 요리수장 어머니 뒤를 이어
고교 졸업 전부터 감자 깎고, 서른셋에 ‘철판요리최강달인’
​​​​​​​‘치고 빠지기’로 리뉴얼 능력 확인…돌고 돌아 ‘오너셰프’ 꿈 

■만나봅시다- ‘킹콩 셰프’ 최승원의 다시 새기는 요리 이야기

카페촌으로 이름난 경기 용인 고기리길을 따라 쭉 들어가다 보면 어느새 행정구역은 성남 분당으로 바뀌어있다. 정원에 둘러싸인 반듯한 건물, ‘데판야키’라고 새긴 간판이 철판요리전문점임을 드러낸다. SBS ‘생활의 달인’ 도왕, 화왕, 철판요리 최강달인 등 3관왕이자, 1세대 푸드테이너 ‘킹콩 셰프’ 최승원이 일하는 곳이다.
최강달인에 오른 2008년은 15년 전으로 당시 그의 나이 서른셋이었다. 고등학교 졸업도 하기 전부터 감자를 깎았다는 최승원 셰프는 칼을 잡은 지 올해로 딱 30년째다.
“350℃ 달궈진 철판에서 굽거나 볶은 요리를 일본에서는 데판야키라고 부릅니다. 불쇼 등 화려한 퍼포먼스 뒤에 최상의 재료를 영양소 파괴 없이 본연의 맛을 살리면서 단시간에 조리해 내놓는,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요리지요.”

흉터라는 흔적을 남기기 위해 맨 처음 상처가 있었다. 최승원 셰프가 말하길, 어쩌면 상처의 흔적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애쓰거나, 또는 기억하고 떠올리기 위한 일종의 증표일 수 있다.
흉터라는 흔적을 남기기 위해 맨 처음 상처가 있었다. 최승원 셰프가 말하길, 어쩌면 상처의 흔적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애쓰거나, 또는 기억하고 떠올리기 위한 일종의 증표일 수 있다.

밤에는 타투아카데미에서 심부름
올림픽 금메달을 목표 삼아 유도선수로 활동했던 그는 부상을 입고 진로를 고민하다 ‘일식 요리사’가 돼보겠단 꿈을 꿨다. 외항선원을 길러내는 인천해사고등학교 3학년 때다. 용기를 북돋아주는 집안 분위기도 힘이 됐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중학생 때 작고한 어머니는 1960~1970년대를 풍미했던 요릿집 중 하나인 서울 남산 ‘한국관’의 요리수장이었다. 

“어머니는 운동 뒷바라지를 해주셨지만, 결국 가야할 길은 따로 있었던 거죠. 어머니 살아생전 뒤를 잇겠다고 했다면 어떤 말씀을 해주셨을까요.”

친구들이 졸업 전부터 외항선을 타고 수습사원으로 일할 때, 그는 조리학원에서 연결해 준 경기 장흥의 한 식당에서 양식과 철판요리를 배웠다. 학교 측의 못 미덥다는 반응에 방학 중 조리사자격증을 취득하는 등 배움과 열정으로 설득했다. 익숙해지자 해외 문화를 경험하고 싶었다. 철판요리를 마스터하니, 호텔 취업문이 좁지 않았다. 웨스틴 조선, 프라자 등 호텔에서 경험을 쌓은 뒤 교환사원으로 일본 등 해외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2000년, 대만에서 일할 때였다. 말도 통하지 않는 곳이라 일과 후에는 여행 삼아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는데 어느 날 타투아카데미와 숍을 함께하는 곳이 눈에 들어왔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타투아카데미를 찾았죠. 요리를 배울 때처럼 심부름을 하면서 타투 세계에 입문했어요. 어려서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었는데, 팔뚝에 직접 나의 정체성을 새기게 될 줄 몰랐습니다. 하하하.”

훤칠한 키(185㎝)에 격투기로 단련한 몸집은 왜 그가 ‘킹콩’이라 불리는지 짐작케 한다. 막 TV방송을 시작한 2005년이었다. 연애하던 시절, ‘킹콩’ 영화를 봤는데 영화를 함께 보고 나오면서 “오빠는 내 킹콩이야. 나를 잘 보호해주잖아”라는 지금 아내의 말이 싫지 않았다. 

“‘푸드 킹콩 최승원입니다’라고 인사를 하고 다녔죠. 사람들은 ‘킹콩 셰프’로 기억을 하더라고요.”

이런저런 방송을 하다 보니 재미가 들렸다. 그래서 MBC방송아카데미에 다니면서 카메라 동선과 발음, 호흡 등을 익혔다. ‘방송을 좀 아는 셰프’라고 소문이 나면서, 2006년엔 KBS ‘세상의 아침’ 고정 코너를 맡았다. 

“소금 폭탄인데 발효식품이라서 좋다?”
최승원 셰프는 ‘한국음식의 세계화는 한국 식자재의 세계화’라는 지론을 펼친다. 

“한국음식문화전략연구원에서 ‘한국음식의 세계화’라는 슬로건을 내세웠을 때 그 자리에 있었어요. 하지만 반대했어요. 반쪽짜리라고요. 단순 음식이 아닌 식자재나 재료를 중점으로 홍보를 했어야 합니다. 한식은 소금이 많이 들어가는 탓에, 김치나 젓갈을 아무리 홍보해도 나트륨 덩어리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소금 폭탄이지만, 발효식품이어서 건강에 좋다’는 논리는 해외에서 받아들이기에 이해할 수 없는 정서라고. 기후 때문에 또는 전쟁을 자주 치러서 저장음식이 발달했다는 지루한 합리화도 문제다. 

“일단, 김치를 선보이고 강원도 고랭지 배추와 무 등으로 만들어야 제맛이 난다고 흥미를 불러일으켰어야죠. 고랭지 배추로 샐러드든, 수프든 만들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랬다면, 지금쯤 ‘식자재 강국’이 됐을 겁니다. 실제, 해외 셰프들도 더 맛있다고 할 겁니다.” 

오마카세(일본 음식점 등에서 주방장 특선이나 주문할 음식을 가게의 주방장에게 일임하는 것)의 인기도 따지고 보면 다르지 않다고. 신조어에 새로운 감성이 더해지면서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는 것이다. 

“일본정통요리 먹을래, 오마카세 먹을래, 그러면 요즘 젊은 친구들은 무조건 오마카세죠.”

한식, 일식, 양식에 철판요리까지 섭렵한 터라 내친김에 자신의 리뉴얼 능력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그의 판단은 옳았다. 

목이 좋은 곳인데 장사가 안 돼서 접은 곳에 권리금 없이 들어가 사람들이 줄을 서서 먹는 곳으로 리뉴얼하고, 3개월 뒤 권리금을 받고 간판째 넘기기를 3~4년. 일명 ‘치고 빠지기’ 방식으로 십수억원을 모았다. 

“돈이 전부는 아니었지만 빨리 모으고 싶었거든요. 더 나아가 가공이나 유통 쪽으로도 능력을 확인하고 싶었어요.”

20억원 가까이 모이자 집 빼고, 차 빼고 현금화한 재산을 육가공전문업체에 지분 투자했다. 육가공상품을 패키지로 구성해 이른바 TV쇼핑 저녁 프라임 타임 시간대에 내보냈다. 2014년 4월16일의 이야기다. ‘세월호 참사’에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됐지만, 최승원 셰프는 집도 팔고, 차도 팔아 또 다른 상품을 기획했다. 결과는, “폭삭 망했어요.” 

다행히 경기 양평에서 터를 닦아 온 장인의 도움으로 그곳에 살 집을 마련했다. 일주일에 방송을 이틀 한다면, 나머지 닷새는 노량진수산시장 등에 새벽부터 나가 회를 떴다. 전부터 알고 지내던 이곳 철판요리전문점 대표의 요청에 2017년부터 일하고 있다. 돌고 돌았지만, 그는 여전히 꿈을 꾼다. 

“오래지 않아 제2의 고향인 양평 서종면에서 오너셰프로서, 유튜버로서 새롭게 인사드릴 겁니다. 튜닝(Tuning·자동차나 오디오 따위의 일부분을 개조하는 일)의 정점은 순정이라고 하잖아요.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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