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헤이리 ‘뱅크 개라지 카페’ 주인 
​​​​​​​신장이식 수술 뒤 관리하며 건강 돌봐

■만나봅시다- 음악 나이 서른한 살 가수 ‘뱅크’ 정시로의 오늘을 사는 이야기

“서른한 살 때 생각했죠. ‘10년 뒤에는 음악적으로 성숙할 것’이라고요. 나이요? 서른한 살입니다. 오래전부터 서른한 살이죠. 하하하.” 
가수 ‘뱅크’ 정시로가 운영하는 경기 파주 헤이리 ‘뱅크 개라지 카페’. 1년 전에 문을 연 이곳은 그에게 ‘아지트’다. 헤이리의 자연 풍광과 이국적인 분위기, 자유로운 공기가 좋아 녹음실을 얻었는데, 그곳에서 몇 년째 작업을 하다 보니 또 다른 공간에 욕심이 생겼다. 
그는 매일 아침 8시30분이면 손님을 맞는다. 커피 맛과 향에 반한 단골이 꽤 된다는 카페 주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 손님이 들어와 커피 몇 잔을 주문한다.

가수 ‘뱅크’ 정시로에게 결혼을 하지 않은 까닭을 물었다. 생각이 묶여있지 않다고, 사진 역시 시선에 관용적이라고, 라이프스타일도 마찬가지라고 전했다. 덧붙여 “어쩌면 이런 말을 했던 게 화근이 아니었나 싶다”면서 “같이만 안 살면 좋다(웃음)”고 말했다. 
가수 ‘뱅크’ 정시로에게 결혼을 하지 않은 까닭을 물었다. 생각이 묶여있지 않다고, 사진 역시 시선에 관용적이라고, 라이프스타일도 마찬가지라고 전했다. 덧붙여 “어쩌면 이런 말을 했던 게 화근이 아니었나 싶다”면서 “같이만 안 살면 좋다(웃음)”고 말했다. 

회복 뒤 ‘큰 오토바이’ 바람 이뤄 
개라지는 차고의 의미를 지닌 ‘Garage’에서 따왔다. 정체성은 카페에 놓인 오토바이 두 대에서 드러난다. 큰 오토바이와 그보다 작은 오토바이다. 카페 한편은 무대다. 공연에 필요한 악기들과 피아노, 그리고 라이브 방송 장비와 여러 음향 장비들이 설치돼 있다. 

“몇 년 전에 신장이식 수술을 받았어요. 어릴 때부터 작은 오토바이를 탔는데, 회복하면 큰 오토바이를 타야겠다고 생각했죠. 바람을 이뤘습니다.”

뱅크의 히트곡 ‘가질 수 없는 너’를 열창하던 때보다 살이 많이 빠진 모습이다. 운동 마니아로서 테니스, 사회인야구 등에 에너지를 쏟아붓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은 체력적 한계가 올 때까지 운동을 하진 않아요. 어쨌든 남의 장기를 얻어 쓰는 거잖아요. 관리하면서 건강을 돌봐야죠. 혹시 잘못되면 함께 운동하던 사람들이 마음 아파할 수도 있고요. 민폐가 있을까봐 조심하고 있습니다.”

개라지 카페에선 그가 다른 가수의 노래를 리메이크한 무대를 선보인다. ‘반토막 라이브’다. 또 한 달에 두 번, ‘기차와 소나무’ 가수 이규석, 배우 이재용과 함께 ‘아삼륙’ 콘서트도 연다. 그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뱅크 채널’도 이곳에서 찍는다. 콘서트 예매는 인터넷에서 진행되는데, 3만원이나 10만원짜리 공연 모두 매진이다. 

개라지 카페서 ‘반토막 콘서트’ 
“콘서트 때는 카페 테이블과 의자를 빼고 간이의자가 들어오거든요. 100석이 넘죠. 그런데요, 커버곡이 100곡이 넘으니까 더는 부를 노래도 없어요. 하하하.”

커피가 좋아 시작한 개라지 카페엔 오전부터 손님이 들어차지만, 고개를 들어 돌아보면 겨우 점심 장사만 하고 오후 3~4시에 문을 닫는 가게들도 많다. 코로나19라는 긴 터널을 지나면서 공연계도 위축됐고, 가수들도 설 자리를 잃었다. 

“운이 좋다고 봐야죠. 사실, 가수는 음악하는 사람으로서 실험정신으로 도전한 거죠. 특히 ‘가질 수 없는 너’는 직접 만든 곡인데, 발표만 해놓고 활동을 하지 않았어요. 수십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노래방 애창곡이고, 젊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 코인노래방에서 더 인기가 있다니…. 그동안 리메이크한 가수가 100명 정도인데, 그들 덕분인 것 같습니다.” 

 

잘할 수 있는 것, 재밌는 일 찾아 ‘맹렬하게’

어쩌다 보니 가수…상표 뱅크로 남고 싶어

 

가수로 알려지기 전부터 건반 세션맨이자 작곡·편곡가로 업계에서 정평이 났던 그다. 뱅크는 정시로의 원맨밴드지만, 그가 만든 상표이기에 가수 정시로가 아닌 뱅크로 남는 게 ‘맞다’고. 

최근엔 고(故) 가수 박정운 추모곡 녹음에 참여했다. 일부는 헤이리 그의 녹음실에서, 일부는 작곡가 박해운·해문 형제의 서울 녹음실에서 진행됐다. 

“정운이 형은 살아생전에 저와 개인적인 관계였어요. 경기 고양 일산의 외진 곳에서 한때 살았는데 거기를 자주 왔었죠. 2층에 살았는데, 누가 ‘가질 수 없는 너’를 불러서 나가보면, 꼭 1층 벽에 붙어서…, ‘또 뭐야’ 그러면서 내려갔던 기억이 나네요.”

한창 활동하던 시기가 아니라 박정운이 부침을 겪을 때였다. 그리고 병색이 짙어져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소식을 접했다. 

故 박정운…아련한 아픔으로 남아 
“어렸을 때가 아니라서 충격을 받았다기보다는, 아련한 아픔 같은 거죠. 형이 겪은 이런저런 사연들도 생각나고…. 병의 진행을 막지 못해 허탈해 하던 표정도 떠오릅니다.”

정시로에게 음악은 예술가의 업이다. 또 그가 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생산성이 높은 작업이다. 성균관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한 뒤 ‘멋있어서’ 음악을 시작했다. 실기가 아닌 이론부터 독학했다. 책에 실린 편곡을 익히고, 노선을 수정하는 방식으로 공부했다. 우리가 기억하는 가수 정시로 이전, 그는 이미 1988년 MBC대학가요제 심사위원이었다. 故 가수 신해철이 대상을 받았던 그 가요제다. 

“항상 서른한 살이라고 생각해요. 음악 천재라면 벌써 죽었을 텐데,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을 보면 천재는 아니죠. 서른이 넘었으니까 오래 사는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그는 스스로를 ‘맹렬하다’고 평했다. 독학으로 배운 음악도, 내친김에 벌인 가수와 뱅크도, 취미 삼아 시작한 사진도 모두 정점을 찍었기 때문이다. 그는 지면광고 등 상업사진가로도 이름이 알려졌다. 20년 전 처음 헤이리를 찾은 이유도 사진을 찍기 위해서였다. 

“어쩌다 보니 가수가 됐는데요, 노래는 저에게 취미죠. 아주 고급 취미입니다. 음악하는 사람이 노래를 하려면 잘해야죠. 쪽팔리게 할 수는 없잖아요.”

뱅크 개라지 카페는 그가 손수 내부 인테리어 공사를 했다. 테마는 배트맨이 사는 고담시다. 영화 ‘다크 나이트’ 시리즈를 참고했다. 조명부터 선반까지. 

“잘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재밌는 일을 되게 잘 찾아요.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죠.” 

카운터 너머에 그가 있다. 그곳에서 커피를 만들고, 설거지를 한다. 또는 가사를 쓰고, 작곡을 하고, 선곡을 한다. 아지트 안의 아지트, 그곳에서 정시로의 시간은 흩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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