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광희 칼럼 - 누리백경(百景)(256)

“먹고 사는 게 중허지. 그깟 몸이 깨끗해 봐야 뭐해?”

소설(박완서의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속 여주인공은, 미군들에게 몸 파는 양공주가 되라는 어머니의 무지스런 압박에 충격을 받는다. 그리하여 서둘러 부잣집으로 시집가지만, 아이를 낳지 못해 이혼당하고, 이어진 두 번의 결혼... 이 세 번의 결혼이야말로 부끄러움이다.

그런 와중에 만난 옛 친구들의 부끄러움의 속살이 퇴색해 버린 허영, 허세, 위선투성이 모습을 보며, 그녀는 말한다.

“학원이라도 세워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라는 깃발을 훨훨 날리고 싶다.”

# 부끄러움을 안다는 건, 자신을 안다는 것이고, 그것은 예부터 리더가 갖춰야 할 중요한 덕목의 하나였다.

<관포지교> 고사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중국 제나라 때 사람 관중(?~BC645)은, 자신의 저서인 《관자(管子)》<목민 편>에서, 나라를 지키는 데는 네 가지의 ‘벼리’(큰 줄기)가 있다고 했다.

여기서 벼리[유, 維]란, 넓은 그물의 위쪽 코를 꿰어놓은 줄로, 이 줄을 오므렸다 폈다 하면서 그물 전체를 움직일 수 있는 근본, 뿌리라고 할 수 있다. 이 벼리 네 가지가 없으면 나라가 망한다고 했다. 하나의 벼리가 끊어지면 나라가 기울고, 두 개가 끊어지면 위태롭고, 세 개가 끊어지면 뒤집어지고, 네 개가 끊어지면 나라가 완전히 멸망한다는 것이다.

배가 기울듯 기울어지면 바로잡으면 되고, 위태로우면 안정시키면 되고, 뒤집어지면 일으켜 세우면 되지만, 멸망한 뒤에는 다시 회복시킬 수가 없다... 그 네 가지 벼리란 무엇인가?

1.예(禮) 2.의(義) 3.염(廉) 4.치(恥)다. ‘예’란 절도를 넘지 않음이고, ‘의’란 스스로 나아가기를 구하지 않음이고, ‘염’이란 악을 감추지 않음이며, ‘치’란 그릇됨을 따르지 않음이다.

이는 곧 절도를 알아 흔들림이 없으면 윗사람이 편안하고, 스스로 나아가지 않으니 백성은 교활함과 거짓이 없고, 악을 감추지 않으니 행동이 저절로 완전해지며, 그릇됨을 따르지 않으니 사악한 일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요즘 우리 세상은 어떤가? ‘나’를 바로 세우고, 역사와 국민을 두려워 할 줄 알고, 부끄러움을 아는 자기성찰이 절실한데, 나라 안 구석구석 독버섯이 가득 피어나고, 졸속과 갖은 편법이 아무런 제재도 없이 판을 친다. 자고나면 말싸움으로 해를 보내는 정치권 얘기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염치도 없고 너무 뻔뻔하다. ‘특권’ 깃발만 펄럭이는 ‘민의의 전당’이란 곳은 범법자의 피난처가 됐다.  

참으로, 아무런 힘 없는 이 나라 국민의 한 사람인 내가 오히려 부끄럽기 이를데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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