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자매네 반디농장 김영란의 전원일기(85)

꽃과 잎이 영원히 만나지 못하는 
슬픈 꽃이 불꽃처럼 강렬하다...

상사화와 꽃무릇은 개화시기와 꽃색이 다르다. 한 달여 전(8월 중순)쯤 피고 진 제주상사화는 엷은 주황색이었는데, 지금(9월 중순) 피고 있는 꽃무릇은 진한 붉은 색으로 강렬한 존재감을 내뿜는다. 둘 다 잎이 없는 상태에서 긴 줄기에 꽃만 매단 형태인데, 한 송이가 피었을 때도 화려하지만 군락을 이뤄 무리를 지으면 그 화려함은 어느 꽃에도 뒤지지 않는다.

제주상사화는 곶자왈(나무와 덩굴이 뒤엉킨 숲)에 많이 식생하는데, 자연스런 숲에 걸맞게 은은하면서도 자세히 보면 화려하다. 자태가 품위 있고, 주변 숲속에서 너무 튀지 않으면서도 볼수록 기품이 넘친다. 처음에는 수수한 듯하나, 자꾸 보면 더 빠져드는 매력을 가진 꽃이 제주상사화(붉노랑 상사화)다. 

상사화와 꽃무릇은 꽃이 지고 나서 늦가을에 잎을 싹 틔운다. 겨우 내내 파란 잎을 싱싱하게 자랑하다가 봄이 되면(4~5월) 잎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겨우내 꽃 피고 잎이 싱싱한 수선화와는 달리, 꽃도 없이 잎만 무성한 아이들을 처음에는 몰라보고 다 캐서 던져버렸다. 꽃도 없는 것이 잎만 무성하다고 괄시하고, 캐서 귤나무 아래로 던져 버리고는 잊었었다.

한 여름 어느 날, 귤나무 아래에 한 무리의 붉노랑 상사화가 피어서 얼굴을 내밀고 있는 것을 보고, 저렇게 예쁜 꽃을 내가 언제 심었는지 되짚어 봐도 기억에 없었다. 가까이서 살펴보니, 내가 캐서 버린 알뿌리들이 그늘아래에서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웠다. 

“이렇게 예쁜 꽃을 몰라보고 내가 다 캐서 던져 버렸구나~” 
그제야 나는 제주상사화의 생태를 알았다.
꽃과 잎이 만나지 못하는 꽃,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꽃말을 가진 상사화와 꽃무릇은 비슷한 생태 사이클이다. 겨울에 잎이 무성하고, 잎이 흔적도 없이 스러진 한여름에 긴 목대에 화려한 꽃을 피운다. 꽃과 잎이 영원히 만나지 못하는 슬픈 꽃이 불꽃처럼 강렬하다.

요즘 마음이 어수선해 꽃과 대화를 하지 못하다가, 추석연휴에 열기를 식히고서야 꽃무릇이 방긋 웃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선홍색 꽃무릇이 무리지어 피어나고 있었다. 귤나무 그늘아래 꽃무릇을 묻어 두었었는데, 무심한 세월 끝자락에 존재를 잊을 즈음에 강렬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예쁜 아이를 보는데 웬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지... 추석 전에 휘몰아 친 태풍 때문에 지하주차장에서 생이별한 중학생 아들과 엄마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지하주차장에 물이 들어찰까봐 차를 빼라는 안내 방송을 듣고 차를 빼러 내려간 엄마를 따라 중학생 아들이 함께 내려갔다. 물이 차오르자 아들만이라도 살리려고 아들을 먼저 보냈는데, 엄마는 기적처럼 살고, 아들은 돌아오지 못한 사연을 듣고 나는 꽃무릇보다도 더 붉게 가슴이 타며 애간장이 녹았었다.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꽃말처럼, 살아서는 만날 수 없는 사이가 된 생이별의 통한을 어이할거나... 살았어도 산목숨이 아닐 엄마의 가슴에 “엄마,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해요~”하고 전했던 아들의 마지막 말. 꽃으로 다시 태어나서 못다 한 사랑을 나눌 수 있기를...
꽃무릇을 보면서, 나는 망부석처럼 앉아 있었다. 꽃 앞에서 제(祭)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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