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광희 칼럼 - 누리백경 (百景)(225)

‘나라 땅은 좁고, 인구는 많아’ 공공의 삶을 위해 선하게 시작된 게 이름도 낯설었던 아파트였다. 그러던 것이 그동안 재산을 불리는 수단으로써 삶을 사는(live) 곳이 아닌, 돈을 주고 사는(buy) 개념의 검증된 공간으로 바뀌어 버렸다. 그리고 돈도 벌 수 있는 그 검증된 공간 속에서 자신의 삶-꿈과 생각, 목표를 맞춰가며 사는 시대를 열었다.

지난해 기준으로 이렇다 할 경제력이 없는 2030세대의 아파트 매입 비중이 전국 평균 31%, 서울 41.7%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한 것을 보면, 분명 아파트가 젊은 세대들에게도 ‘내집마련’보다는 ‘재테크’의 주된 방법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이 세상에서 아파트의 시초는, 2500여 년 전 고대 로마의 임대 집합주택이었던 인술라(insula)다. 6~7층으로 돼 있던 이 주택은, 맨 아래층은 주로 상가, 위층은 주거공간으로 돼 있었다. 초기엔 상·하수도 개발이 안돼 전염병에 취약했고, 목조인 탓에 화재 위험이 많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는, 일제시대인 1932년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에 지어졌던 5층짜리 유림아파트다. 그후 순수 국내기술로 처음 건립된 아파트는, 1958년에 건립된 종암아파트다. 이 아파트는 건국 이후 최초로 ‘아파트먼트(Apatment)’라는 타이틀이 붙었고, 수세식 화장실이 처음으로 갖춰졌다.
당시 이 종암아파트 준공식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참석해 축사를 하기도 했다.

그후 4년 뒤인 1962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단지형 아파트’라 할 수 있는 마포아파트가 서울 마포구 도화동에 건립됐다. 이 아파트는 당시 서구 유럽의 도시 주거 개념인 ‘녹지 위의 고층주택(Tower in the park)’ 이론을 국내에 도입한 최초의 사례였다. 당시로서는 좀체 보기 힘든 6층 아파트.

# 현대식 입식 싱크대를 갖춘 중산층 아파트 한강맨션이 모델하우스를 앞세우고 등장한 건 1968년이었다. 이미 다 만들어진 집을 사는 게 아니라, 견본 모델하우스를 보고 나중에 지어질 집의 공사비를 대주는 ‘분양 시대’가 이 아파트부터 처음 열렸다.

이어서 1972년에는 서구식 근린주거 개념으로 파출소, 쇼핑센터, 유치원~고등학교까지 한 아파트 단지 안에 자리잡은 여의도 시범아파트가 건립됐다.
이를 계기로 아파트가 입주자 수준과 사회적 계급을 따지는 일종의 이익집단 성격으로 진화해 ‘똘똘한 한 채’가 됐다. ‘차별의 시대’의 정착이다.

또한 그 몇 년 뒤인 1978년에는 한강 모래톱 허허벌판 뽕나무밭이었던 잠실벌에 아파트 총 364동 1만9180가구, 인구 10만 명의 소도시가 조성돼, 한강매립지에 도시를 세운 토건시대의 대표적 유산이자, ‘뉴 타운’의 시초가 됐다.

이렇게 해서 콘크리트 블록으로 이웃과 단절되고 ‘인간’만 있는, 사회관계망이 파괴된 ‘성냥갑, 벌집, 닭장’으로 불리는 ‘우울한’ 사회가 완성됐다. 이 우울한 사회 건설은 2100:1이라는 치열한 청약경쟁률 속에서 ‘시세 차익’을 내건 깃발을 휘날리며 지금도 한창 앞으로 앞으로 행진 중이다. 이름해서 ‘아파트 공화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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