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명견 교수의 재미있고 유익한 옷 이야기(118)

"은이 재산상의 가치보다 
삶을 아름답게 꾸미던 
옛 장신구로서의 은으로 
우리 곁에 돌아왔으면..."

코로나19로 인해 예전과는 다른 경제현상들이 벌어지고 있다. 유동성 자금이 투자로 집중되고 있어, 주식은 물론 금, 그리고 은 투자까지 열풍이 불고 있다. 특히 은은 현재 전 세계 매장량이 56만 톤가량으로, 20년 이내에 채굴이 완료될 예정이라니 수요 증가와 공급량의 한계를 생각하면 투자가치가 크다고 보는 것 같다. 

은은 예로부터 잘 알려진 금속이다. 금에 비해 까다로운 정제법을 거쳐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고대에서는 금보다도 은이 더 귀중하게 취급되기도 했었다. BC3000년경 이집트·메소포타미아의 고대 유적으로부터 발견되며, BC6세기경의 리디아왕국에서는 은화가 처음으로 제조됐고, 그리스·로마로 이어졌다.  

십자군전쟁이 끝나고 유럽에 대항해시대가 열리면서 바다를 통한 동방무역이 활발해졌다. 중국이나 인도 등과의 무역에서 은은 절대적인 화폐였다. 유럽인들이 그렇게도 갈망했던 동방의 진귀한 물품들을 가져오기 위해 유럽의 은은 바닥이 날 정도가 됐다. 바로 그즈음 아메리카 신대륙의 발견과 그곳의 은은 뜻밖의 보물창고였다. 이 와중에 인도를 비롯한 동양의 여러 나라들이 식민지로 전락하는 비운을 동반하기도 했다. 은이 세계역사를 뒤흔드는데 공헌을 한 결과다. 

은은 이 땅에서도 긴 세월동안 우리의 역사와 함께했다. 5세기에서 6세기의 신라고분에서 은 세공품들이 많이 출토되고 있어 당시 은의 활용과 세공기술이 높은 수준에 이르렀음을 시사해 준다. 고려시대에도 표충사청동함은향완(表忠寺靑銅含銀香垸), 금산사향로(金山寺香爐) 등은 간결하고 균형 있는 모양과 은사입(銀絲入)의 우아한 문양으로 유명하다. 

1543년 일본 규슈 남단 다네가시마(種子島)의 도주 도키타가(時堯)는 포르투갈 상선원으로부터 머스킷(화승총) 두 자루를 샀다. 대가는 은 2000냥,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 20억 원 가량으로 병사 200명을 약 1년간 유지할 수 있는 비용이었다. 그런데 변방의 도주가 어떻게 이렇게 많은 은을 가지고 있었을까? 1526년 일본에서 이와미(石見) 은광이 발견됐다. 그러나 은 제련술이 없었다. 당시 광석에서 은을 빼내는 비밀은 혁명적 기술이었다. 그 비밀을 알고 있던 조선에서 천대받던 기술자 두 명이 일본으로 망명해 이 새로운 은 제련술을 소개하고 가르쳤다. 덕분에 변변찮던 이와미 광산은 순식간에 당시 멕시코에 이어 일본을 세계 2위의 은 생산국의 위치에 올려놓았고, 일본에 은이 넘쳐나게 됐다. 일본은 이렇게 사들인 두 자루의 조총을 복제와 개량을 거듭한 후 1592년 임진년 조선을 침공할 때 조선의 심장을 향해 쏘았다. 우리의 뛰어난 기술을 간수하지 못한 한(恨)의 끝이었다.

그러나 은의 이 같은 슬픈 역사를 뒤로하고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허리띠, 귀고리, 가락지, 뒤꽂이, 비녀, 향갑, 귀이개, 은장도 등 여성들의 손끝에서 사랑 받던 장신구이고 생활필수품이었으며 때론 여성을 지키는 호신품이기도 했다. 
은이 투자 대상이 되는 재산상의 가치보다 삶을 아름답게 꾸미던 옛 장신구로서의 은으로 우리 곁에 다시 돌아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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