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자수필-귀농아지매 장정해씨의 추억은 방울방울

▲ ‘무섬마을 만죽제’ 인터넷 홈페이지 캡처

"외나무다리를 강 건너까지 
조심조심 걸어가 다리에 걸터앉아 
엉키며 돌아가는 물무늬를 본다"

드디어 김장을 끝내고 굳은 허리를 편다. 마음먹고 시작했지만 몸과 마음에 누적된 피로감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켜놓은 TV 화면으로 사막같이 넓은 백사장에 구불구불 펼쳐진 외나무다리가 동화 속의 한 장면처럼 눈길을 사로잡는데, TV자막에 영주 무섬마을이라고 뜬다. 

“아빠, 당신 오늘 충주 치과 가는 날이지? 나랑 어디 좀 가볼려?” 남편은 뒤도 안돌아보고 그러자고 한다. 안 그래도 여행에 목말랐던 남편은 카메라 가방에 달랑 칫솔 하나 챙기곤 앞장을 선다. 
충북과 강원도와 경북의 도경계를 거치며 첩첩산중 소백산맥의 줄기를 따라 영주를 들어서니 소수서원과 부석사 이정표가 먼저 뜬다. 여기까지 왔는데 잠깐 들러보고 무섬마을로 가자는 남편 말과 여러 해 전에 갔었던 병산서원의 아름다움이 기억나서 우리는 차에서 내렸다. 65세 이상은 무료입장이라니, 역시 전통을 중시하는 고장인가 싶다. 

무섬마을은 400년 된 전통마을로 마을 전체가 고택과 정자로 이뤄져 전통가옥에서 민박을 할 수 있고, 내성천 외나무다리와 금빛모래 강변이 아름답다. 어둠을 뚫고 아침에 예약한 가옥으로 찾아가니 할머니가 반갑게 맞아주신다. 민박을 위해 내부를 현대식으로 수리했지만 좁은 방과 화장실... 시집 가 처음으로 시댁에서 잤던 토담집이 떠오른다. 

아침에 해뜨기를 기다려 7시에 숙소를 나와 본격적으로 무섬마을을 보러 나섰다. 강을 따라 선 긴 뚝방에 오르니 눈앞엔 안개가 가득 진을 치고 있다. 강둑을 내려서니 안개는 기다렸다는 듯이 남편의 몸체를 삼키고 투명망토를 뒤집어써 보이질 않는다. 안개는 마치 미농지 두어 장을 겹쳐 붙인 듯 산도 언덕도 나무도 다리도 보일 듯 말 듯 실루엣 속으로 가라앉혀 우리의 보려는 기대를 완전히 무너뜨린다. 

눈에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라도 보이지 않는 세상은 존재의 근원마저 의심케 한다. 홀로 남겨진 듯 등짝이 서늘하다. 앞을 막는 안개를 뿌리쳐보려고 옷자락을 털어본다. 해가 뜨나 동쪽하늘을 살피지만 물안개는 더 피어오르고 숨 쉴 때마다 눅눅한 안개 냄새만 더한다. 

눈은 세상을 읽는 통로다. 근데 안개는 허를 찌르듯 내 눈을 무용지물로 만든다.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인간을 얼마만큼 무력화시키는지, 내 발조차 맘대로 내지르지 못한다. 안개의 먹성은 어디까질까. 아침 8시를 넘겼으면 해는 이미 떴으련만, 나는 희뿌연 안개 구덩이 속에서 뭉텅한 촉수를 빳빳하게 곧추세운다. 

안개에 휘둘리던 해가 9시를 넘기니 서서히 제 모습을 보이지만 그래도 미세먼지 때문인지 선명하지는 않다. 나는 아무도 없는 낮은 외나무다리를 강 건너까지 조심조심 걸어가며 다리에 걸터앉아 엉키며 돌아가는 물무늬를 본다. 남편은 훼손되지 않은 천혜의 자연이 주는 몽환적이며 환상적인 사진을 얻었다고 좋아한다. 기척 없이 왔다가 간 것에 내가 너무 흥분했을까, 여전히 미세먼지로 명징하지 못한 풍경을 구경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집 앞 목도 강변의 억새는 더 희게 부풀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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