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자매네 반디농장 김영란의 전원일기(45)

강요하지 않은 길이지만 
옳은 길이라는 신념으로 
힘들어도 건강한 길을 찾아 
17년을 헤쳐 나왔다...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 지난여름은 긴 장마로 참으로 힘들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올려놓아 주시고, 들판에 햇빛을 가득히 풀어놓아 주소서.
마지막 열매들이 살이 찌도록 도와주시고, 그들에게 이틀만 더 따뜻한 날을 베풀어 주소서.
열매들이 무르익도록 해 주시고, 무거운 귤송이에 마지막 단맛을 채워 주소서...” 

3개월간의 긴 장마를 끝내고 10월 햇살이 눈부신 가을이 되자, 나는 릴케의 시 ‘가을날’을 각색해서 읊조리며 귤맛이 달아지기를 염원했다. 과일은 기호품이라 맛이 없으면 판매에 큰 지장이 초래되는지라, 긴 장마는 또 다른 재앙 요인이었다.

나부터 입맛이 너무 업그레이드돼 있어서 미세한 차이까지도 감지해 ‘맛이 있느니, 없느니’ 타박하며 까탈을 부리는지라, 소비자의 기호를 탓할 수가 없다. 아무리 유기농이 몸에 좋다고 외쳐도 입에서 맛있다고, 들이부으라고 유혹을 해야 먹지, 과일을 약처럼 먹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가을 햇살을 찬양하며 은총을 부어주시라고 저절로 기도가 나온다.

농부가 일 년 내내 농사를 지어서 가을에 알찬 결실을 얻는 염원과, 그 결실을 제값을 받고 판매를 해야만 생계유지를 할 수 있기에 상품성이 떨어지면 아득해진다. 긴긴 장마에 노심초사했지만 다행이 10월 햇살이 보약이 돼서 귤맛은 평년 수준으로 돌아오고 있다.

이미 주변에는 귤색이 노랗게 나자 일찍 출하하면 좋은 값을 받기에 수확하느라 분주하지만, 나는 밥이 알맞게 뜸이 들어야 최적의 맛을 내는 것처럼 귤맛이 깊어질 때를 기다리고 있다.

시장이 거의 파장하려고 할 때에 출하를 시작하는 바보 농부. 아무리 빨리 달라고 보채도 들은 척도 안하고 기다리는 바보 농부. 나무에서 완숙됐다고 사인을 보낼 때까지 기다리는 고지식한 바보 농부. 나무에서 익을 때까지 기다리느라고 수십 번을 골라서 따 내리는 바보 농부. 그렇게 따 내리면 인건비가 3배 이상 드는 데도 원칙을 고수하는 바보 농부. 그러다가 몇 번이나 얼려서 손해를 감수했어도 여전히 그 길로 가는 바보 농부. 해마다 기상이 달라서 공산품처럼 일정하지는 못하지만, 그해 상황으로는 최선이 될 때까지 기다리는 바보 농부. 아직도 1%밖에 안 된다는 유기농 귤농부 바보 농부 김영란. 유기농 10년 하고 빚밖에 안 남았다며 유기농 접은 농부를 봤어도, 전량 직거래로 정면 돌파한 단순 무식한 바보 농부.

모두가 좌향좌 할 때 혼자서 우향우 할 수 있는 용기는 무엇이었을까? 무지, 오기, 신념, 믿음, 미련... 그 무엇도 나를 표현하기 적절치는 않다. 그냥 멋모르고 들어선 유기농부의 길을 돌아서 갈 수도, 포기하기도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그 누구도 나에게 강요하지 않은 길이지만 옳은 길이라는 신념으로 힘들어도 건강한 길을 찾아 17년을 헤쳐 나왔다. 가시밭길이었지만 나는 꽃밭을 만들면서 걸어왔다. 농부가 돼서 나답게 살게 됐다.

이제 결실의 계절, 나에게 무한 응원으로 힘을 주셨던 회원님들께 최선을 다해 농사지은 유기농귤로 감사의 마음을 담아서 보내드릴 것이다. 나는 완전무장하고 임무완성하려고 신발끈을 단단히 묶고 있다. 드디어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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