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자수필- 귀농아지매 장정해씨의 추억은 방울방울

"유난히 가을이 짧은 듯한 
올해는 만추의 아름다움을 
지나치는 게 마음 저리다..."

한동안 안온했던 날씨가 입동(立冬)에 들어서자마자 비바람을 몰고 와 화려하게 물든 배나무 낙엽을 순식간에 휘몰아 떨어뜨려 농원 바닥은 온통 황금빛이다. 어딜 가든 나무마다 그 발밑은 발갛고 노란 비단길이다. 유난히 가을이 짧은 듯한 올해는 만추의 아름다움을 지나치는 게 아깝고 마음 저리다.

과수원의 배가 그래도 평년작은 되고 보니 저장고 공간이 부족해 여름내 넣어뒀던 잡동사니를 모두 꺼냈다. 재작년에 쓰던 누룩도 있고, 묵은 쌀도 한 말가량 되고, 콩이니, 들깨니 등등 버릴 건 버리고 정리를 한다. 나는 누룩 3㎏을 널어 말리고 이슬을 맞춰 한 이틀 법제를 하고, 묵은 쌀을 씻고 불리고 고두밥을 쪄 누룩과 섞어 술을 안쳤다. 전기담요로 싸놓은 술독에서 벌써 술냄새가 난다. 사나흘 지나 술이 완성되면 찌꺼기째 쏟아 물로 희석해 배밭에 거름으로 뿌려줄 참이다. 한 해 동안 배를 키우느라 가장 고생한 나무들의 노고를 위로하고 감사하는 뜻으로...

입동은 겨울의 깃대를 일으켜 세우고 만물에게 긴 휴식을 예고한다. 무를 뽑다가 풀숲 사이에 웅크리고 있는 꽃뱀 한 마리를 보고 깜짝 놀랐다. ‘왜 동면에 못 들어갔나... 이상기후 때문일까.. 죽을까.. 살까..’ 난리법석을 떨었다. 풀과 꽃은 마르고 나무는 잎을 다 떨어내고 벌판은 텅 비어간다. 자연의 섭리를 따라 가을과 겨울이 어지럽게 교차하는 때지만 한 해 농사를 잘 마무리해 엄동설한을 미리 준비하고, 거둬들인 것이 적으면 적은대로, 많으면 많은대로 곳간을 가장 풍요롭게 채우는 때가 요즘이다. 

이 같은 때는 가난함과 부유함, 귀함과 천함을 떠나 누구나 마음이 넉넉해진다. 그래서 예부터 마을에선 대대적으로 연로한 연장자를 경로하며 다양한 나눔축제를 즐기던 ‘치계미’(雉鷄米)란 세시풍속이 있었다. ‘치계미’는 말 그대로 꿩과 닭과 쌀이다. 옛날 사또에게 바치던 식재료인데, 마을 어르신을 지방수령처럼 정성껏 모신다는 뜻의 잔치다. 어르신을 공경하고 위로하기 위해 베풀었던 치계미에는 빈부를 가리지 않고 마을 전체가 자발적으로 참여해 정성껏 음식을 대접했다. 한 겨울을 무사히 지나고 건강하시라는 경로사상의 발현이자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사상이 깃든 의미 있는 큰 행사였다.                
11일 우리 마을에서도 귀농청년들이 경영하는 유기농 카페가 주체가 돼 농협활성화센터에서 관내 어르신을 모시고 나눔축제를 한다고 초대장이 메일로 날아왔다. 세시풍속을 실현하려는 의도인지 알 순 없지만 참 귀하고 기특했다.  

이제 한 주가 지나면 얼음이 얼고 눈이 내린다는 소설이다. 눈 덮인 하얀 겨울의 낭만을 가진 이라면 약속이 없어도 첫눈이 오는 날엔 누군가를 만나길 기대하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그때쯤 떡가루 같은 눈이 흩날리는 날,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절인배추에 김장김치 속을 넣으며 버무리고 있지 않을까~ 벌써 올해도 다 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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