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품대장정> 한식의 계승과 세계화 Ⅲ - 한식의 뿌리를 찾아 (38)

<도심재개발로 곧 사라질 종로1가 피마골.>

 

제사 후 희생고기 탕에서 유래한 설렁탕·곰탕·장국밥

 

서울은 전국 각지에서 생산되는 음식재료 중 좋은 것들만이 다투어 진상됐던 곳이어서 자연히 왕실은 물론 서울에 사는 양반이나 부호들의 음식사치가 대단했다. 그러나 호구에 급급했던 서민들은 조상 제사나 잔치 때가 아니면 반가의 음식을 맛보는 것은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었고, ‘낮것상’(점심)을 받는 것도 감지덕지였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서민음식이 설렁탕과 곰탕, 장국밥, 육개장이다.


선농제 후에 나눠먹던 ‘선농탕’
고대부터 수천년을 농본지국(農本之國)으로 살아온 우리 민족은 농사의 신을 매우 소중하게 받들어 모셨다. 그래서 어느 왕조건 종묘의 제사와 농신에 대한 제사를 2대 국가제사로 하여 임금이 직접 제주가 되어 제사를 지내는 것이 관례였다.
조선시대에는 선농(先農. 처음으로 농사를 가르친 신)에 제사 지내는 제단인 선농단(서울 동대문구 제기동 소재)을 쌓고, 경칩절기 후에 임금이 친히 이곳에 나가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올리고, 소매를 걷고 들어가 손수 밭을 가는 친경(親耕)을 했다. 친경을 하고 나면 임금을 수행했던 귀족·정승·판서 등 문무백관과 노인·농민·노비·거지에 이르기까지 이 제사에 희생된 고기(나라제사엔 소를 희생시키는 것이 관례였다)를 탕(湯)으로 만들어 나누어 먹는 노주례(勞酒禮)를 베풀었다.
이때 임금에서 거지까지 한솥 국을 나누어 먹던 희생음식이 선농탕(先農湯)이고, 선농탕이 구개음화 하여 설롱탕이 됐다가 오늘날의 설렁탕이 된 것이다.
이러한 유래를 가지고 있는 순수한 서울음식 설렁탕이 일반 서민대상의 장사음식으로 처음 판매되기 시작한 곳은 서울의 명륜동이다. 당시 명륜동에는 나라의 제사 때 쓰이는 가축희생물을 관장하는 사람들이 모여 살았으며, 이들이 한말·일제시대를 거치면서 대대로 왕실에 의해 세습돼 오던 직업을 잃게 되자 손에 익은 설렁탕(선농탕)을 끓여 파는 것을 호구지책으로 삼았던 것이다.

 

<좌:설렁탕, 우:장국밥>

그 뒤 설렁탕이 서울사람들 대부분이 즐겨먹는 대표음식으로 자리잡게 되었는데, 서울 장안에서 호가 났던 곳이, 지금은 헐리고 없는 종로 네거리 화신백화점(현재의 국세청·삼성 건물) 뒤켠 골목 일대의 ‘이문안’이었다. 이 지역 인근에는 당대 세도가 대감들이 많이 살았는데, 특히 이 운종가(종로)의 이문안은 설렁탕·곰탕과 막걸리가 유명했다.
이때의 일화로 이런 얘기가 있다.
철종 때 안동김씨 세도가의 핵심인물로 영의정을 지낸 김병국 대감이 이문안 부근 교사동에 살고 있었다. 그는 이문안의 막걸리와 설렁탕 술국이 맛있기로 소문나 있는 것을 알고 어느 하루는 탕건에 동저고리 바람으로 이 이문안에 있는 한 목로집에 들렀다. 그런데, 맛있게 먹고 보니 막상 돈을 갖고 나오질 않았다. 김 대감은 주인에게 음식값을 아이를 시켜 갖다 주겠노라 사정했지만 신분을 알 턱이 없는지라 주인은 막무가내였다. 그때 허술한 행색을 한 막벌이꾼 하나가 실랑이 하는 모습을 보고 있다가 설렁탕값을 대신 내주고는 가시게 하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말붙일 사이도 없이 휙 가버렸다.
김병국 대감은 이때의 일에 자극받아 그의 정치철학을 바꾸었다는 것인데, 이것이 연유가 되어 ‘이문안 술국값’ 하면 대가를 바라지 않는 선의(善意)를 뜻하게 되었던 것이다.
설렁탕뿐만 아니라 이문안 막걸리 맛도 대단했던지 궁중에서 마시는 어용주(御用酒)를 이 이문안에서 만들어 대었는데, 그 공로로 이 목로집 주인은 선달 벼슬을 받고 한 해에 1천석의 녹봉을 받는 국고 선혜청의 창고지기로 발탁됐다고 한다.

 

옛맛 지켜가는 전문설렁탕집들
서울의 영고성쇠와 궤를 같이 한 이문안은 도심재개발로 지금은 옛 정취를 거의 찾아볼 수 없는데, 그나마도 개발의 삽날에 구옥 몸통을 잘린 이문(里門)설렁탕집이 이러저러한 격동의 역사 그루터기를 부여안은 신산한 모습으로 대를 물려가며 옛맛을 지켜가고 있다.
그 외에 서울 장안에서 설렁탕 잘하기로 소문난 맛집으로는, 마포 용강동 마포나루 부근의 마포옥과 공덕동 로터리의 마포양지설렁탕, 을지로 2가 뒷골목의 이남장, 그리고 신촌설렁탕, 강남 신사동의 영동설렁탕집 등이 있다.
소뼈와 고기를 푹 우려낸 구수한 육수와 수육, 김치, 깍두기가 나름의 조리방식에 따라 약간씩 맛의 차이는 있으나 거의 대동소이하게 비교적 본래의 맛을 지켜가고 있는 전문 설렁탕집들이다.

 

지나간 역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는 종로 이문설렁탕집의 고풍스런 모습.

 

서민음식문화의 정취서린 ‘피마골’
서울 한복판에서 이문안 말고도 서민들의 애환이 서려 있는 먹거리 골목이 종로의 피마골(避馬洞)이다.
종로1가에서 6가까지 큰 길 뒤편에 나 있던 좁은 골목길로, 고관대작들이 부산하게 거들거리며 다니던 대로를 피해 서민들이 다니던 뒷길이다. 겨우 말 한 마리 지나다닐 정도의 폭인데, 서민들이 큰길을 가다가도 높은 사람의 행차를 멀리서 보면 말머리를 이 골목으로 돌렸다 하여 피마골이란 이름이 붙었다.
그런 탓에 자연히 이 골목은 서민들의 길이 됐고, 서민을 상대로 하는 대중적인 음식장사가 이 골목에서 번창했다. 특히 이 골목에는 명물 음식점들이 즐비하게 자리하고 있어서 서민의 음식문화를 더듬어 볼 수 있는 종로의 명물이기도 했는데, 목로술집을 비롯해 내외술집, 모주집, 그리고 색주가집(후에 ‘종삼’ 윤락가로 불림) 등이 집중돼 자리잡고 있었다.
목로집은 선술집이다. 주인장 옆에 쇠고기를 넓게 펴 잔칼질로 저민 다음 양념을 한 너비아니, 날돼지고기, 산적, 생선 등을 담은 목판이 놓여 있고, 그 건너에 안주 굽는 중노미가 큰 대젓가락을 들고 서 있다. 술꾼이 들어오면 젓가락통에서 젓가락을 집어들고 진안주판에서 먹고 싶은 안주를 집어다 석쇠 위에 얹고서 목로 앞에 선다. 중노미가 그것을 구워내면 주인은 술독에서 술 한 잔 퍼 술국과 더불어 손님 앞에 낸다.
특히 종로1가 이문안 목로집 술국은 유명해 대감집 곰국보다 낫다는 소문이 나 있을 정도였다.
내외술집은 목로집보다 격이 높은 술집으로, 몰락한 양반이 먹고 살 방편으로 하던 술집. 양반 체통인 내외를 깎듯이 하던 집이라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손님이 내외술집에 들어 “이리 오너라” 하면, 주인여자는 방문 안에서 “손님께서 거기 있는 자리를 깔고 계시라고 여쭈어라” 한다. 손님이 자리를 잡고 “술상을 내보내시라고 여쭈어라” 하면 술상을 방문 밖에 밀어 내어 놓는다. 음식을 다 먹고 난 뒤에는 “값이 얼마냐고 여쭈어라” 하면, “몇 주전자가 나갔으니 몇 푼이라고 여쭈어라” 한다. 손님이 돈을 상에 놓고 “잘 먹고 나간다고 여쭈어라”하고 나가는데, 주인 여자는 절대 손님 앞에 나타나지 않으며 있지도 않은 얘기전달자를 가운데 둔 것처럼 대화를 주고받으며 남녀간의 내외예법을 지키던 이상한 양반술집이었다.

 

신분에 따라 격을 달리한 장국밥집
또한 이 피마골에는 문간에 울긋불긋한 종이쪽을 주렁주렁 둘러맨 등을 내건 집이 여럿 있었는데, 바로 유명한 서민 먹거리 장국밥집이었다.
피마골 장국밥집(후에 청진동 해장국집으로 발전)은 이용하는 손님의 신분에 따라 격을 달리 했는데, 수표다리 언저리의 장국밥집에는 재상 등 고관들만이 가고, 백목다리 부근의 장국밥집에는 등·봇짐 장수만이 다녔으며, 무교동의 장국밥집에는 조정의 육조에 드나드는 엽관패들이 많이 드나들었다.
그러나, 이렇듯 갖가지 애환서린 이 골목길의 명물 맛집들도 개발에 밀려 거의 떠났고, 교보문고 옆 종로1가에 마지막 남아있는 골목길도 미구에 사라질 것이어서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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