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자수필- 귀농아지매 장정해 씨의 추억은 방울방울

"벌써 바람결에 날아드는 
풀벌레 소리가 애잔하다. 
추석이 한 달 남아선지..."

이글이글 기세등등하게 구리철사 같던 삼복의 태양이 처서를 지나며 한결 누그러졌다. 햇볕이 완연히 달라지고 파란 하늘에 솟아오른 하얀 뭉게구름은 잭이 콩줄기를 타고 오르던 동화 속 그림 같다. 멀리 과수원 입구에서 배롱나무 가지를 흔들던 바람이 배나무 언덕을 올라 매실나무 잎을 건드리고 마당을 가로질러 거실 창문으로 술렁술렁 불어온다. 마당가 너럭바위 틈으로 자유분방하게 자란 박하가 마디마디 층층이 하얗게 꽃을 피웠다. 박하의 환하고 화한 허브향이 그 바람결에 묻어와 온 집을 돌아다니며 산뜻하다.  

처음엔 다문다문 몇 포기 자라던 것이 해가 갈수록 얼마나 풍성하게 번져 피어나는지... 자연의 생명력은 대단하다. 우리 집에는 주인이 신경 안 써도 잘 자라고 개화기간이 길면 더 좋은, 사람이든 풀이든 화초든 좀 덜 예뻐도 순둥순둥 잘 크고 퍼지는 게 많다. 저보다 몇 배나 큰 나비와 벌을 불러 친구 삼는 보랏빛의 방아, 별처럼 작지만 또렷한 참취꽃, 끝물 접시꽃, 올해 처음 본 진노랑의 볼륨감 넘치는 곰취꽃, 자주보랏빛의 곤드레꽃, 왕고들빼기 줄기를 신나게 감아 올라가 종 모양의 자줏빛 통꽃으로 조롱조롱 매달린 더덕꽃, 뒤안 그늘에 가만히 숨어서 식솔을 거느리고 무리지어 있는 보라색 달개비꽃, 큰 대자로 활짝 핀 호박꽃, 밤이면 노오랗게 피었다 해 뜨면 오므리는 수줍은 달맞이꽃 등등 아기자기한 이야기가 넘친다.

척추협착증이 종아리까지 내려와 걸어 나다니는 일이 만만치 않아 집 안팎으로만 뱅뱅 묶여 있으니 가을농사는 모두 남편 몫이다. 시골 사는 재미는 철따라 심고 가꾸고 자라는 걸 보는 것인데, 남편을 쫓아다니지 못해 좀이 쑤시고 엉덩이에서 사리가 나올 판이다. 그래서 남편이 걷어온 토마토로 주스를 만들어 씻어 말린 우유팩에 넣어 냉동고에 저장하고, 들깻잎 두어 바구니 따온 걸 장아찌 담고, 참외밭에서 걷어온 덜 익은 참외 한 바구니는 전통탁주를 만들고 걸러낸 술지게미로 참외장아찌를 만들어 볼 참이다. 먹고 남는 가지와 애호박은 장독대 위에서 말리고, 일주일에 한 번씩 따는 붉은 고추는 옥상에서 한낮 따가운 매미소리가 말리고 있다. 

남편은 걷어낸 빈 땅을 다시 갈아엎어 이랑을 만들고 김장배추 모종 반판(60개), 무씨 한 봉지, 돌산갓씨 한 봉지, 이웃집에서 얻은 골파 한 봉투를 심었다. 배나무를 베어 낸 빈터라 일조량도 부족하고 농사짓는 실력도 별로여서 심은 것의 절반만 수확한대도 감지덕지다.
벌써 바람결에 날아드는 풀벌레 소리가 애잔하다. 추석이 한 달 남아선지, 남편 지인이 배 주문을 하나보다. “올해는 추석 전에 배 보낼 수 있겠어. 벌써 색이 들어오고 있어.”  

심어 놓은 어린 모종은 활착을 잘 해내고 있는지 남편과 나는 바구니에 깻잎 조금, 오이 몇 개 저녁 찬거리를 담으며 과수원을 걷는다. 산꿩이 우리 눈앞에서 가벼운 몸사위로 쫑쫑 점프하면서 앞서 가며 우릴 투명인간 취급을 한다. “하하 제 좀 봐라.” 남편의 시선은 새를 뒤쫓고, 나는 광활한 하늘을 향해 그저 한 가지 기도만 되풀이 한다. 
다시 릴케의 ‘가을날’의 시구를 읊조린다.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 지난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마지막 과일들을 무르익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녘의 빛을 주시어/ 열매의 무르익음을 재촉하시고/ 포도주에 마지막 단맛이 /짙게 스미게 하소서...   

기후변화 때문인지 몇 년간 제대로 된 배를 수확하지 못한 농부의 가슴에 이 기도는 어느 때보다 간절하고 절실하다. 바구니 속 가득한 깻잎향을 끌어안고 들어오며 오늘 저녁은 깻잎 후레이크를 해 볼 생각이다. 발걸음이 바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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