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뷰 - 수협중앙회 박신철 조합감사위원장

어릴 적 지지리도 가난했다. 사회에 나와서는 남이 하려들지 않는 일을 찾았다. 굴곡이 있었지만 60 평생 값진 삶을 살고 있는 수협중앙회 박신철 조합감사위원장의 이야기다.
34세 늦깎이로 수산직 기술고시에 합격한 후 자존과 소신을 신조로 정면돌파 하며 공무를 추진한 그는 바다 가꾸기와 어민보호에 큰 성과를 냈다.그의 삶은 우리 인생행로에 좋은 지침이 될 듯하다.

 

수산직 기술고시 합격해 공직 입문
남이 하지 않는 일에 항상 능동적 참여
바다 지키기와 어민보호 기여 보람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마도로스를 꿈꾸다
“경기도 연천에서 태어나 평택으로 이사와 살았습니다. 가난했던지라 먹을 게 없어 고구마 수확이 끝난 남의 밭을 두 형과 함께 파곤 했습니다. 그러다보면 운 좋게 미처 수확하지 못한 고구마를 캘 수 있었어요. 그 고구마로 주린 배를 달랜 거죠.”
어머니의 주도로 산을 개간해 고구마밭을 만들었다. 삽질을 많이 하다 보니 신발에 구멍이 날 정도였다고 그는 회상했다.

하루는 품을 팔고 돌아온 어머니가 “찐빵을 쪄줄 테니 당원을 사오너라”며 5원과 10원짜리 동전을 그에게 내줬다. 빵을 먹게 된 기쁨에 들떠 가게에 뛰어갔는데, 그만 동전이 주머니에서 빠져나가고 없었다.
어머니는 그의 침착치 못함을 가르치려 붓을 사주며 붓글씨를 쓰라고 했다. 국민학교 6년 동안 붓글씨를 쓰며 한자공부를 했는데, 그게 습관이 돼 요즘도 붓을 잡는단다. 어머니의 자식사랑을 지금껏 가슴에 새기고 있는 그다.

박신철 위원장은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 등록금 마련과 집안을 도우려고 육군 중사로 5년간 복무했다. 제대를 하고 5대양 6대주를 누비는 마도로스를 꿈꾸며 부산수산대학에 들어갔다. 중고등학교 때부터 1~2등을 했던 그는 부산수대에서도 학업에 두각을 보여 3학년 2학기 때, 교수 추천으로 스페인에서 선배가 운영하는 회사에 인턴으로 취업했다. 그곳에서 일할 당시, 배가 침몰해 선원이 죽자 선주가 유족에게 피해보상을 하지 못하고 도망가는 모습에 환멸을 느껴 귀국했다고 한다.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연이은 대박...
공직으로 선회한 후 24년간 정면돌파

수대 졸업 후 취항실습의 승선 기회마저 놓친 그는 마도로스의 꿈을 접었다. 그리곤 친구의 소개로 자동차 영업사원이 돼 차를 팔았다. “큰 빌딩 안에 있는 회사들은 잡상인 출입을 엄격히 통제했어요. 그럴 땐 회사 여비서에게 잘 접근해 명함을 얻어내 차를 팔기도 했습니다.”

평소 박 위원장의 활달한 성격과 사교성이 좋은 것을 알고 있던 친구가 막 붐이 일던 무역업체 취업을 권유해 그는 직장을 옮겼다. 당시에는 중국에 무선호출기(일명 삐삐)가 없었는데, 그는 홍콩업체와 제휴해 미국에서 무선호출기 가동용 기지국 자재를 들여와 중국에 설치해주는 일로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한다.
그 즈음 정부 주도로 요식업체 대상 물수건 쓰기 운동이 시작됐다. 박 위원장은 파키스탄으로 건너가 목화를 사들이고, 그것을 인건비가 싼 중국에 가져가 물수건을 제작해 한국에 들여왔다. 물수건 1장에 고작 50전 내지 1원이 남는 장사였지만 컨테이너로 1TEU(컨테이너 한 개)만 들여와도 수천만 원이 남는 대박을 쳤다. 그 때는 월급이 100만 원 정도여도 잘 살 때였다.

이러한 성과에도 회사의 대우는 변변치 않아 심기가 불편했던 차에 대학 후배가 찾아와 수산직 기술고시 응시를 권유했다. 그는 회사일을 하면서도 밤잠을 줄여가며 공부를 해 고시에 합격했다. 그때가 그의 나이 34세였다.
그는 공직에 입문하면서 ‘틀린 것을 옳다하지 않고 비뚤어진 것을 바르다고 하지 않겠다’는 신조로 올바른 일은 정면돌파 하며 공무를 수행했다. 박 위원장은 24년간 공직생활 중 보람 있었던 몇 가지 일을 들려줬다.

어민과 바다를 살리는 일이라면...
박 위원장은 한때 김종필 국무총리실에 파견돼 일을 했는데, 해양오염 점검회의에서 그의 진면목을 확인하는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어선이 조업 활동 중에 발생하는 각종 쓰레기를 귀항해 육지에 버려야 하는데, 마땅히 쓰레기를 처리할 곳이 없다보니 그냥 해양에 투기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박 위원장은 ‘고기가 바다의 주인’이라는 관점에서 상사의 지시가 없었는데도 자발적으로 해양폐기물 종합대책을 만들려고 과장에게 보고했다.

과장의 만류와 방해에도 불구하고 정면돌파해 해양폐기물 종합대책을 만들었고, 이 대책은 범정부 종합대책으로 채택돼 해양폐기물관리 5개년계획이 수립됐다. 그의 신념이 바다와 고기, 어민을 보호하게 된 것이라 일생일대의 기쁨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얘기를 하나 더 들려줬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중국의 시진핑 주석과의 정상회담 협의 안건으로 중국 어선의 한국수역에서의 불법조업을 막을 협상 자료를 만들어오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한다. 박 위원장은 주요 경로별 중국어선 저지전략을 꼼꼼히 세운 회담 초안을 대통령과 관계 장관, 청와대 비서진들이 합석한 자리에서 알아듣기 쉽고 간단명료하게 보고해 대통령에게 칭찬을 받았단다.
중국에서의 한·중 정상회담 전, 양측 실무자 사전조율회의에서 중국 측이 양국간 불화가 될 만한 자료의 완화를 요구했지만, 이를 거절하고 정상회담에서 원안대로 관철시킴으로써 우리의 수역을 지키는데 기여한 것도 큰 보람이었다고 그는 으쓱했다.

또 하나의 얘기.
박 위원장은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요구한 경남 통영의 굴양식장 위생검사에 대비해 육지의 오염원 차단과 어선 내 휴대 화장실, 해상 공중화장실 설치 등을 1년 만에 완료해냈다. 다른 나라들이라면 4년이나 걸릴 일이었다.
FDA의 검수에서 실격하면 통영산 굴을 미국에 수출할 수 없고, 다른 나라로의 수출길도 막힐 처지였지만 이를 성공적으로 해결해 우리 어민 보호와 수산행정에 큰 기여를 한 것이다.

한편, 박 위원장은 국립수산과학원장으로 발령받아 연구원들을 독려해 저명한 국제학술지에 연구논문 40여 편을 발표하도록 하는 등 수산과학원의 위상을 높이는 운영 혁신을 이뤄내기도 했다.
박 위원장은 수산과학원장으로 공직을 끝내면서 ‘인생은 정면돌파’라는 책을 펴냈다. 남이 안하는 일을 능동적으로 찾아 성공을 거둔 열정의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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