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기획연재
추석·설 명절 주제가로 불리던 ‘망향의 노래’■ 그 옛날의 트로트- 노래의 고향을 찾아서
박광희 기자  |  history814@hanmail.net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20.09.04  11:01:16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msn

<19> 고향 그리는 노래(2) <고향무정><고향역>

   
▲ 오기택의 고향인 전남 해남군 북일면 오소재 쉼터에 세워진 <고향무정> 노래비

(1) 오기택의 <고향무정>

   
▲ 오기택앨범

1. 구름도 울고 넘는 울고 넘는 저산 아래
   그 옛날 내가 살던 고향이 있었건만
   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
   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
   산골짝엔 물이 마르고 기름진 문전옥답
   잡초에 묻혀 있네.

2. 새들도 집을 찾는 집을 찾는 저산 아래
   그 옛날 내가 살던 고향이 있었건만
   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
   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
   바다에는 배만 떠 있고 어부들 노래소리
   멎은지 오래일세

                 (1966, 무인도(김운하)작사/ 서영은 작곡)

 

흡사 저 고려 때 문신 야은 길재의 시조구절 ‘산천은 옛 모습 그대로인데, 인걸(사람)은 간 데 없네’를 연상시키는 노랫말 이다. 거기에 가수 오기택(吳基澤, 1939~ )의 무게감 있는 중저음의 목소리가 듣는 이들로 하여금 아련한 향수에 젖게 한다.

   
▲ 전성기 때의 오기택

<고향무정(故鄕無情)>의 노랫말은 작사가 이름이 ‘무인도’라는 예명으로 발표됐다.
본명은 김득봉. 김운하(金雲河, 1914~1978)라는 또다른 예명을 사용했는데, 세상에 잘 알려진 노래들로는 <물새야 왜 우느냐>(손인호) ,<님이라 부르리까>(이미자), <금산 아가씨>(김하정), <나룻배 처녀>(최숙자), <서산 갯마을>(조미미), <충청도 아줌마>(오기택) 등이 있다.

함경북도 웅기가 고향인 김운하는, 1966년 정초에 이북출신 실향민들과 함께 눈 내리는 휴전선 부근 임진강에 갔다가 6.25때 자신에게 월남할 것을 권유했던 대학(일본 메이지대 불문학부) 동창생 친구의 아버지(당시 평양 숭실대 교수)를 그리며 <고향무정> 가사를 썼다.
그런 작사동기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고향무정>은 특히 실향민들을 위로하는 노래로 각별한 사랑을 받아왔다.

1962년 <영등포의 밤>으로 데뷔해 그 한 곡으로 단숨에 스타가 된 오기택은 <고향무정>이 히트할 무렵의 얘기를 이렇게 들려줬다.
“<고향무정> 반응은 <영등포의 밤>을 능가했다. 라디오를 틀었다 하면 이 노래가 나왔고, 전파사와 레코드 가게 등 서울 시내 가는 곳마다 <고향무정> 노래가 나왔다.”

만년에 누리는 ‘고향 유정(故鄕有情)’
오기택은 <고향무정>을 발표하던 1966년 한 해에 <아빠의 청춘>, <충청도 아줌마>, <마도로스 박> 등의 노래들이 연이어 히트를 하면서 순식간에 ‘국민가수’로서의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1997년 남해 추자도 부근의 무인도로 혼자 낚시를 갔다가 뇌출혈로 쓰러진 후 극적으로 회생, 지금은 휠체어에 의지해 남의 도움없이는 독자적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처지에서 재활의 의지를 다지고 있다.

자신은 노래를 잊은지 오래지만, 그의 고향인 전남 해남에서는 2007년부터 해마다 <오기택 전국가요제>가 열리고 있고, 서울 영등포역 앞 타임스퀘어 문화광장에 <영등포의 밤> 노래비가, 고향인 해남 북일면 오소재 쉼터에는 <고향무정> 노래비가 고향 주민들의 성원으로 세워져 있어, 불우한 여든 두살 노구의 몸인 그에게 ‘고향 유정(故鄕有情)’의 위로가 되고 있다.

 

(2) 나훈아 <고향역>

1. 코스모스 피어 있는 정든 고향역
   이쁜이 곱분이 모두 나와 반겨주겠지
   달려라 고향열차 설레는 가슴 안고
   눈 감아도 떠오르는 그리운 나의 고향역

2. 코스모스 반겨주는 정든 고향역
   다정히 손 잡고 고갯마루 넘어서 갈 때
   흰머리 날리면서 달려온 어머님을
   얼싸아고 바라보았네 멀어진 나의 고향역

                                  (1972, 임종수 작사·작곡)

 

   
▲ 전성기 때의 오기택

이 노래는, 한 마디로 ‘트로트 황제’ 나훈아(羅勳兒, 본명 최홍기, 1947~  )의 촌스럽던 무명시절을 한 방에 날려버린 곡이다. 1966년 서라벌예고 2학년 때 <천리길>로 데뷔한 이후 지금까지 일관되게 견지해 오고 있는 나훈아 노래들의 대체적인 주제-사랑·고향·어머니에 맞춤인 노래이기도 하다.
해마다 설이나 추석명절 때가 되면 기다렸다는 듯이 나라 안 도처에서 불리는 나훈아의 노래가 <고향역>이다.

무명작곡가의 처절한  역정 서려 있어
이 노래 작곡가 임종수(林鍾壽, 1942~ )는 전북 순창이 고향으로 젊은 시절 가수가 되겠다고 무작정 상경했다.
그러나 ‘개성 없는 음색의 한계’를 짚어주며, 작곡가 나화랑이 그에게 노래보다는 작곡을 권유한다. 그렇게 해서 임종수는 창작에 매달리게 되고, 그 68번째 창작품이 <고향역>의 기본 모태가 된 <차창에 어린 모습>이란 곡이었다.

임종수는 이 곡을 기필코 나훈아에게 부르게 하겠다는 집념으로 나훈아가 소속돼 있던 오아시스 레코드사에를 3개월간 출근하다시피 하다 드디어 나훈아를 만나 취입허락을 받아내고, 1970년 3월 음반이 나온다.
그러나 무명의 신인작곡가인데다가 ‘불건전한 가사가 국민의식 개혁운동과 배치된다’는 이유로 ‘방송불가’ 판정이 나와 그대로 묻혀버릴 위기에 놓였다. 이때 레코드사에서 만난 나훈아가 임종수에게 의외의 제안을 했다.

   
▲ 최근 발매된 나훈아 신곡앨범 <2020 신곡 아홉이야기>

“<차창에 어린 모습>은 방송이 안되게 됐으니 슬픈 가사를 떼내고 건전하게 고쳐주이소. 리듬도 트로트에서 경쾌한 고고로 바꿔주시고예~”
이 말을 듣고 임종수는 불현듯 중학교 때 어머니의 배웅을 받으며 기차통학 하던 때를 떠올리고, 본인의 신세한탄으로 돼 있는 <차창에 어린 모습> 가사를 확 뜯어고쳐 ‘꿈속에 찾아가는 그리운 고향 이미지’로 바꿨다. 제목 또한 <고향역>으로 바꾸고 2년 만인 1972년 재취입을 했다. 그러나 반응은 기대이하로 신통치 않았다. 게다가 나훈아가 소속사를 지구레코드사로 옮기는 악재가 겹쳤다.

그럼에도 오아시스 레코드사 측이 <고향역>을 타이틀 곡으로 내세워 <나훈아 7집> 앨범을 재발매 한 뒤 적극적인 홍보전략을 폈다. 이것이 주효해 그해 추석명절때 맞춤처럼 대히트를 하며, 나훈아에게 MBC 10대 가수상의 영예를 안겨줬다.
“가수는 꿈을 파는 사람이다. 꿈을 팔려면 꿈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꿈을 잃어버렸다”며 잠적하듯 칩거를 거듭하던 나훈아가, 최근 새 앨범 <2020 신곡 아홉이야기>를 가지고 ‘꿈을 팔러’ 다시 우리 곁을 찾아왔다.

 

나훈아의 말·말·말

   
▲ 나훈아·김지미 결혼발표 때 모습(1973)

# 1973년 7월9일, 나훈아(1947~ , 당시 26세)가 7년 연상의 여배우 김지미(1940~ , 당시 33세)와 재혼을 발표해 사회적 이슈가 됐었다.
결혼 후 김지미의 고향부근인 대전 신탄진에 신혼집을 꾸리고 일체의 활동을 접고 칩거했는데, 돌연 나훈아의 가요계 복귀로 둘의 사이가 나빠져 결혼 8년만인 1981년 1월5일 이혼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나훈아는 “나를 남자로 만들어 준 여인”이라며, 자신이 가지고 있던 돈(재산?)을 전부 위자료로 김지미에게 건네주고 이 말을 남겼다.
“남자는 돈 없어도 살 수 있지만, 여자는 돈 없으면 살 수 없을 것이다.”

# 나훈아는 사회 고위급 인사들의 개인적 연회에 불려(?)가서 노래를 부른 적이 단 한번도 없다.(당시 인기 가수들이 개인행사에 초대되면 노래 3곡 정도 부르고 3000만 원의 돈을 받았다) 실제 나훈아는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의 초대 제의를 단 한마디로 딱 잘라 거절한 적이 있다.
“나는 대중예술가다. 따라서 내 공연을 보기 위해 줄서서 표를 산 사람들 앞에서만 공연을 한다. 내 공연을 보고 싶으면, 당장 표를 끊어라!” (이 일화를 듣고 그의 자존·자부심에 감탄해 나훈아의 팬이 된 삼성그룹의 고위 간부도 있다.)

# 2008년 1월, ‘젊은 여배우(김혜수·김선아)와의 스캔들로 일본 야쿠자에게 남자의 중요 신체부위를 훼손 당하는 보복을 당했다’는 루머가 돌자 직접 기자회견을 자청해 열고, 이 자리에서 사실무근이라고 해명하며 단상에 올라가 바지 벨트를 풀고 지퍼를 내리며 기자들에게 말했다.
“여러분(기자)들이 펜으로 사람(연예인들)을 죽이는 겁니다. 제가 5분간만 보여드리면 믿겠습니까?”
이 해명기자회견을 가진 후 세상이 혐오스러웠던지 활동을 접고 칩거에 들어갔다.

박광희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수원시 권선구 수인로 43-23 길전빌딩4층(서둔동 9-36)  |  대표전화 : 031-294-6166~8  |  팩스 : 031-293-6166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유미
농촌여성신문의 모든 컨텐츠(기사)는 저작권법 보호를 받으며, 무단복제 및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Copyright © 2013 농촌여성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rw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