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옛날의 트로트 - 노래의 고향을 찾아서

<16> <산장의 여인>과 권혜경

        

▲ <산장의 여인> 노래비(2019년 충북 청주시 문의면 문의문화재단지 내 건립)

<산장(山莊)의 여인>

(전주에 뻐꾹새 울음소리~뻐꾹~뻐꾹~)

▲ 권혜경의 히트곡 앨범 <산장의 여인>, <호반의 벤치>

1.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단풍잎만 채곡채곡 떨어져 쌓여 있네
   세상에 버림받고 사랑마저 물리친 몸
   병 들어 쓰라린 가슴을 부여안고
   나홀로 재생의 길 찾으며 외로이 살아가네

2.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풀벌레만 애처로이 밤새워 울고 있네
   행운의 별을 보고 속삭이던 지난 날의
   추억을 더듬어 적막한 이 한밤에
   임 뵈올 그날을 생각하며 쓸쓸히 살아가네

                    (1957, 반야월 작사 / 이재호 작곡)

 

이 노래는 뻐꾸기 울음소리로 시작된다.
고즈넉한 산장의 적막을 깨는 건 뻐꾸기 울음 뿐이다. 노래처럼 이 노래를 부른 가수 권혜경(權惠卿, 1931~2008)도 그렇게 평생을 고고한 독신녀로 외롭게 살다 갔다.
그것도 일흔일곱 해의 절반 이상을 병마에 시달리면서 노래따라 살다 갔다.

▲ 권혜경의 가수활동 전성기 때 모습

고급스런 팝스타일 창법 주목받아
권혜경의 본명은 권오명(權五明). 강원도 삼척이 고향이다. 세무공무원인 부모님 슬하 2남4녀 중 셋째딸로 어려서부터 노래에 재능이 있어 성악가의 꿈을 키워가고 있었으나, 완고한 부모님 뜻에 따라 동구여상고 졸업 후 조흥은행에 입사했다. 그리고 현모양처의 길을 가는가 싶더니, 끝내 노래에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1956년 KBS 전속가수(3기) 공채모집에 응시해 합격하면서 가수의 길을 걷게 된다.

그리고 그 이듬해(1957년)에 <산장의 여인>을 불러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된다.
고급스런 팝 스타일의 창법에 가늘게 떨리는 듯한 청초한 음색의 애절한 목소리는, 센티멘털(감상적인) 감성을 자극해 일약 톱스타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그럼에도, 부모님은 그런 딸을 ‘풍각쟁이’라며 집안에 들이지 않았다.
그녀는 이 무렵의 일을 한 신문에 기고한 글 <노래로 살아온 나의 인생>(1965.11)에서 이렇게 토로했다.

“내가 집에서 쫓겨난 지도 10년이 된다. 완고한 구식 부모님은 내가 노래를 부르며 돌아다니기 때문에 조상에게 대할 낯이 없다든가, 부모를 개망신 시킨다는 등의 공격의 도를 가하여, 나도 집에서 더 머물러 있지 않은 것이다. 나는 집을 뛰쳐나왔다. 내 청춘과 정열이 최고조로 열화같이 타오르기는 아마 이때였을 거다.”

병마와 평생 싸워…봉사로 극복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 좋은 일에 흔히 나쁜 일이 많음을 뜻함)라 했던가. 스물 아홉살 나던 1959년 심장판막증 판정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후두암·늑막염·백혈병·자궁암·관절염·저혈압·뇌신경 증세까지… 병마와의 외롭고도 긴 사투가 시작됐다.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그렇게 쓰러지기 직전의 몸이었지만, 무대에만 서면 혼을 실어 열창을 했다.

이러한 그녀에게 지극한 배려의 손길을 뻗은 이가 작곡가 박춘석이었다. 라디오 드라마 <호반에서 그들은>의 주제가 <호반의 벤치>(1962, 이보라 작사/황문평 작곡)의 히트 이후, 영화 <물새야 울지마라>주제가인 <물새 우는 해변>, 영화 <유랑극장>주제가 <유성이 흘러간 곳>,<검은 꽃잎>, <첫사랑 화원> 등의 노래들이 모두 박춘석의 곡들이다. 그와 함께 성악곡인 김성태의 <동심초(同心草)>도 권혜경의 격을 높여준 노래다.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가수활동보다 투병생활에 주력하며 강연·공연을 겸한 봉사활동에 올인한다. 불교에 귀의해 ‘대명화’라는 법명을 받고 전국 교도소를 400여 차례 돌며 재소자 교화와 격려에 힘썼다. 그녀는 전국 교도소 재소자들에게 ‘어머니’로 불렸다. 이때 그녀는 ‘덤으로 사는 인생 봉사로 즐긴다’는 신조를 가슴에 새기고 살았다.
세상을 뜨기 직전까지 부모님과 집안의 연고가 있는 충북 청원군 남이면(외천리)의 외딴집에 홀로 살며, 좁은 안마당에 작은 구덩이를 직접 파 자신이 묻힐 자리를 만들어 놓고, 그 앞에 <산장의 여인> 노래비를 세우는 게 꿈이라던 그녀. 그녀는 가고 이제 이 세상에 없지만 노래로 남은 ‘산장’은 여전히 외롭고, 세상 또한 괴로움이 깊고도 끝없는 고해(苦海)의 바다다.

 

■  가요 Topic

20~30대에 요절한 가수들
노래 따라 가버린 노래 인생들

노래에는 사람의 마음을 혹하게 하는 마성(魔性, 악마같은 성질)같은 게 있다.
부르는 가수나, 따라부르는 일반 대중이나 그 노랫말이나 곡조의 분위기를 자신의 감정에 이입시켜 자기와 동일시 하며, 때로 극단적인 선택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처럼 우연찮게도 흡사 노래 따라 가는 것처럼 이 세상을 떠난 노래 인생-가수들도 우리 주변엔 있다.
정말 ‘우연의 일치’ 일까.

▲ 윤심덕(1897~1926)
일제강점기 일본 유학파 신여성으로 클래식(성악)을 전공했지만 생계를 위해 대중가요를 부르고 연극무대에 섰다.
1926년 같은 일본 유학파인 목포 갑부의 아들이자 유부남인 연인 김우진과 일본 시모노세키와 부산을 오가는 부관페리호 배에서 현해탄에 몸을 던져 정사(情死)해 사회적 파문을 일으켰다. 흡사 그녀가 부른 노래 <사(死)의 찬미> 가사처럼…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 /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싫다~’
이때 그녀의 나이 29세 였다.

 

 

▲ 차중락(1942~1968)
그룹사운드 키보이스 리드보컬로 활동하다 솔로로 독립해 잘생긴 외모와 달콤한 목소리로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1935~1977)의 노래 <포 애니씽 댓츠 파트 오브 유(For anything that’s part of you)>를 번안한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을 불러 ‘가을 남자’로 특히 여성팬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그는 1968년 11월10일 공연 중에 급성뇌막염으로 쓰러져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 노랫말처럼 그렇게 스물일곱 시퍼런 나이에 이 세상을 떠나갔다.
그의 묘소 앞 묘비에는 조병화 시인의 시 <낙엽의 뜻>이 새겨져 있다.
- ‘사람 가고/ 잎 지고 /갈림길에  소리없다’ (부분)

▲ 배호(1942~1971)
바닥에 안개처럼 낮게 깔리는 저음의 바이브레이션 창법과 진한 호소력으로 <돌아가는 삼각지>, <안개 낀 장충단 공원>, <누가 울어>, <파도> 등의 노래들을 히트시키며 최고의 인기가도를 달리던 무렵인 1971년 10월, MBC 심야프로 <별이 빛나는 밤에>(디스크 자키 이종환 진행) 방송 출연을 마치고 나와 감기몸살로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했다. 그때 ‘회복 불능’이라는 병원측의 통고를 받고 퇴원해 집에 가기 위해 미아리 고개를 넘어가던 중에 앰뷸런스 안에서 세상을 떴다. 사인은 신장염 악화. 이때 그의 나이 29세. 이 무렵 세상에 내놓은 <0(영)시의 이별>, <마지막 잎새>는 흡사 그의 죽음을 예견한 듯한 유작이 됐다.

▲ 하수영(1948~1982)
1976년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로 인기가도를 달리던 중 1981년 겨울 ‘부산 초량동의 한 당구장에서 당구 치다 뇌출혈로 쓰러져’(친조카 하주주씨 증언) 1982년 1월1일 동의대 병원에서 34세로 세상을 떴다. ‘나는 다시 태어나도 당신만을 사랑하리라~’고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에서 노래했지만, 그는 총각이었다.

 

 

▲ 김정호(1952~1985)
처연한 멜로디와 창법으로 울림이 큰 노래를 불렀던 <하얀 나비>의 가수 김정호는 폐결핵으로 서른세살에 세상을 떴다. 1983년에 내놓은 <님>에서 ‘간다~간다~날 두고 정든 님 떠나간다~’ 절규했는데, 정작 그 자신이 먼저 세상을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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