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옛날의 트로트 - 노래의 고향을 찾아서

▲ 박달재휴게소 앞 목각공원에 조성된 <울고 넘는 박달재>노래비와 박달도령·금봉낭자 조각상(충북 제천시 백운면 봉양읍 박달재 정상 소재)

<11> <울고 넘는 박달재>와 박재홍의 노래들

두 연인의 박달재 이별스토리
일제시대와 1945년 8.15 해방공간, 그리고 1950년의 6.25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대중가요- 즉, 트로트들의 주경향은 고향과 부모·형제를 멀리에 두고 떠도는 ‘실향’과 ‘방랑’을 소재로 한 ‘신파적 비애감’이었다.
무에 그리 못다 푼 한과 서러움이 많았던 것일까….

그 무렵, 현인의 <비 내리는 고모령> (1948)과 함께 가장 인기 있었던 트로트는 박재홍(朴載弘, 1924~1989)의 <울고 넘는 박달재>(1950)였다. 지난 4월 KBS의 <가요무대>가 지난 35년간 가장 많이 방송된 노래 100선을 소개·방송했는데, <울고 넘는 박달재>가 전체 순위에서 백난아의 <찔레꽃>에 이어 2위를 차지해 그 인기를 실감케 했다.

이 인기에는 박재홍의 가늘면서도 호소력 있는 서민적인 구수한 창법도 창법이지만, 특정지역을 소재 삼아 스토리로 풀어가며 토속적 향취를 물씬 풍겨주는 반야월(半夜月, 1917~2012)의 애달픈 노랫말이 크게 한 몫 했다.

▲ <울고 넘는 박달재> 노랫말을 지은 작사가 고 반야월

반야월의 생전 회고에 따르면, 해방 후 자신이 만든 <남대문 악극단>을 이끌고 지방 순회공연을 다니던 중, 비 내리는 제천의 박달재 고개를 넘어가다가 그만 버스가 고장 나 악극단 단원들 모두가 쉬게 됐다는 것.
이때 박달재 고갯마루에 있는 서낭당에서 어느 시골 부부의 애절한 이별장면을 보고 노랫말을 지었다는 것이다. 2절 가사에 등장하는 박달도령과 금봉낭자의 영화같은 로맨스 얘기는, 극적인 재미를 더해 주기 위해 보태진 픽션이다.

            

        <울고 넘는 박달재>
1.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
   물항라 저고리가 궂은 비에 젖는구려
   왕거미 집을 짓는 고개마다 구비마다
   울었소 소리쳤소 이 가슴이 터지도록

2. 부엉이 우는 산골 나를 두고 가는 님아
   돌아올 기약이나 성황님께 빌고 가소
   도토리 묵을 싸서 허리춤에 달아주며
   한사코 우는구나 박달재의 금봉이야

                   (1950, 반야월 작사 / 김교성 작곡)

 

▲ 박재홍의 고향인 경기도 시흥5동(지금의 서울 금천구 독산4동) 금천체육공원에 2001년 조성된 <울고 넘는 박달재> 노래비

이 <울고 넘는 박달재>가 세상에 나와 한참 인기를 더해 가면서 바야흐로 유행가도에 접어들 때 인데, 두달 만에 어이없게도 6.25전쟁이 터졌다. 여기서 박재홍의 생전 얘기를 들어보자.
“솔직히 난 박달재가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모르고 그냥 이 노래를 불렀어요. 그런데 끔찍한 전쟁이 터진 거예요. 그래서 피난 갈 때나 한번 박달재를 가보려 했는데, 누군가가 경북 문경 어디쯤에 있다고 해서 가보지도 못하고… 그냥 피난민들과 같이 <울고 넘는 박달재>를 부르며 부산까지 피난을 내려갔어요. 그때 같이 있던 피난민들은 내가 이 노래를 부른 가수란 걸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고… 아무튼 그때를 평생 잊을 수가 없습니다.”

▲ 충북 제천의 박달재 관문

 

‘고향 그리움’ 자극한 노래들 연속 히트
박재홍은 경기도 시흥에서 토목건설 청부업을 하는 아버지 슬하 두 아들 중 맏이로 태어났다.
시흥에서 보통학교 3학년 때 아버지의 일을 따라 온가족이 함경남도 함흥으로 이사해 신흥보통학교를 다녔다. 그 후론 아버지 사업장을 따라 온가족이 전전하게 됐는데, 심지어는 압록강 수력발전소, 서울의 조선전선주식회사 등에서 전기기술자로 일하기도 했다. 이때 익힌 전기기술은 훗날 노래 외의 생업수단이 되기도 했고, 데뷔 전에 한때는 은행에 잠시 근무했던 이력도 있다.

박재홍이 가수가 된 건 1946년 그의 나이 23살 때다. 당시 서울의 중앙극장에서 열린 오케레코드사 전국콩쿠르에서 4000명의 참가자 중 1등을 차지하면서 본격 가수의 길로 들어섰다.(당시 심사위원은 박시춘·김해송·남인수 였다)
첫 데뷔곡은 1948년에 옥두옥(1927~  )이란 여가수와 듀엣으로 취입한 <눈물의 오리정>(반야월 작사/ 박시춘 작곡)이다.

본명이 ‘김 문’인 옥두옥은 1947년 송민도·원방현·금사향 등과 함께 KBS전속가수 1기로 뽑힌 인물로 결혼과 함께 미국 이민을 가 1956년 미국의 알씨에이(RCA) 빅타레코드에서 ‘문 킴(Moon Kim)’이란 이름으로 장세정의 <역마차>, 현인의 <고향만리>를 영어버전으로 발표해, 그 싱글음반이 한국으로 역수입 됐던 ‘우리나라 최초 미국진출 여가수 1호’다. 그녀가 부른 <청춘 부르-스>(1949, 반야월 작사/ 박시춘 작곡)는 한동안 현인의 <신라의 달밤>과 함께 상당한 인기를 모았었다.

아무튼 어수선한 피난살이 속에서 <울고 넘는 박달재>로 일약 톱스타가 된 박재홍은, 도미도레코드사로 전속을 옮겨 <물방아 도는 내력>이라는 경쾌하고도 빠른 템포의 희망노래를 내놓으며 전원으로의 귀향을 꿈꾼다.

 

       <물방아 도는 내력>
1.벼슬도 싫다만은 명예도 싫어
   정든 땅 언덕 위에 초가집 짓고
   낮이면 밭에 나가 길쌈을 매고
   밤이면 사랑방에 새끼 꼬면서
   새들이 우는 속을 알아보련다

2.서울이 좋다지만 나는야 싫어
   흐르는 시냇가에 다리를 놓고
   고향을 잃은 길손 건너게 하며
   봄이면 버들피리 꺾어불면서
   물방아 도는 역사 알아보련다

                    (1953, 손로원 작사/ 이재호 작곡)

 

음성의 톤이 가늘지만 정감있는 그의 목소리와 노랫말은, 고된 피난살이에 지친 실향민들을 위무하기에 충분했다. 이어 내놓은 <향수>도 히트가도를 달렸다.
<물방아 도는 내력> <향수>의 연이은 히트에 이어 미도파 레코드사로 전속을 옮긴 박재홍은 부산 피난살이의 애환이 서린 40계단에서의 에피소드를 이야기의 모티브로 이끌어 낸 손로원의 노랫말이 눈물겨운 <경상도 아가씨>(1955, 손로원 작사/ 이재호 작곡)를 연달아 내놓으며 탄탄하게 인기정상을 구축한 뒤, <휘파람 불며>(1957) 등 100여 곡의 노래들을 봇물처럼 거침없이 쏟아낸다.

‘사십계단 층층대에 앉아 우는 나그네 / 울지 말고 속시원히 말 좀 하세요 / 피난살이 처량스러 동정하는 판자집에 / 경상도 아가씨가 애처로워 묻는구나/ 그래도 대답없이 슬피우는 이북고향 언제 가려나’
실제로 박재홍은 부산 피난살이 시절, 국제시장의 난전 한 귀퉁이에서 유성기 바늘 판매를 겸한 <유신전기상회>라는 조그만 점포를 직접 운영하기도 했었다.

 

‘4.19혁명곡’으로 불린 <유정천리>
길고도 암울했던 부산 피난살이를 접고 서울로 환도한 후인 1959년, 신신레코드사로 전속을 옮겨 김진규·이민자 주연의 영화 <유정천리(有情千里)> 주제가를 부른 것이 오히려 본영화보다도 더 큰 인기를 누리면서 박재홍은 졸지(?)에 주목받는 사회인사가 되기도 했다.
특히 <유정천리>가 나오고 1년 뒤인 1960년, 3.15 대통령 부정선거-4.19 혁명 촉발로 이어지는 당시 자유당 이승만 정권하의 정치상황에서 정치에 혐오를 느낀 민초들에 의해 <유정천리>가 <4.19 혁명곡>으로 명명되고, 가사가 바뀌어 불리기 시작했다. ‘힘들고 외로워도 두메산골 내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소박한 실향민의 꿈을 노래한 것일 뿐인데, 심지어 박재홍은 자유당 당원으로부터 린치를 당해 잠시 까무러치기도 했던 일화도 있다. 4.19 개사버전은 별도 음반으로까지 나왔으나 큰 호응은 얻지 못했다.

 

        ※4.19버전 <유정천리>
1. 가련다 떠나련다 해공선생 뒤를 따라
   장면박사 홀로 두고 조박사도 떠나갔다
   못살아도 나는 좋아 외로워도 나는 좋아
   자유당에 꽃이 피네 민주당에 눈이 오네

2. 세상을 원망하랴 자유당을 원망하랴
   춘삼월 15일에 조기선거 웬말인가
   천리만리 타국땅에 박사죽음 웬말인가
   설움어린 신문들고 백성들이 울고 있네

 

여기서 조박사는 대통령선거 한달 전 미국에 건너가 월트리드 육군병원에서 수술받다 심장마비로 죽은 유석 조병옥 당시 민주당 대통령후보이며, 해공은 신익희를 말한다.
이 당시의 상황을 1960년 2월22일자 <동아일보> ‘휴지통’에서는 이렇게 스케치 보도하고 있다.
- ‘경북 전역에 걸쳐 중·고등학생들이 가요 <유정천리> 곡조에 맞춰 조박사 추모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교사들은 상부로부터 추궁을 받을까 봐 학생들의 호주머니를 뒤져가며 가사 적은 쪽지를 찾아내기에 혈안이 되고 있다지만, 울고 웃는 사람들의 칠정을 뉘라서 막을소냐. 노래 속의 구절처럼 백성들이 울고 있는 것 뿐인데…’

아무튼 재정난으로 다 쓰러져 가던 신신레코드사는 박재홍의 노래들로 인해 다시 우뚝 일어섰다. 그리고 사업수완이 있었던지 서울에서 한때 레코드재료 무역업을 하기도 했던 박재홍은 ‘물소’라는 별명처럼 늘 과묵하고 말수가 적었으며, 좀체로 화를 내지 않는 온화하고 다정다감한 성품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그런 이면에 의리 또한 깊어 형편이 어려운 친구들을 돕기도 하고, ‘우리에게 고유의 가요가 없는 것이 아쉽다’며 특히 최갑석·박경원·은방울자매 등 후배가수들을 힘 닿는 데까지 지원해 주며, 건전한 창작가요와 유능한 가수가 많이 나오기를 늘 간절히 염원하기도 했다.

아쉽게도 그는 예순 다섯이라는 길지 않은 수를 살다가 지병으로 타계했다. 지금도 <울고 넘는 박달재>며 <유정천리>의 카랑카랑하면서도 서민적인 풍모가 느껴지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황혼빛에 젖어드는 그의 산같은 뒷모습이 눈에 어려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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