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희 칼럼 - 누리백경(百景)(142)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떠나자고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당신 나에게 마음을 어떻게 가져왔고, 또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 왔었나요. 함께 누우면 언제나 나는 당신에게 말하곤 했지요.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어찌 그런 일을 생각하지도 않고 나를 버리고 가시는 가요.…’

이 편지는 지금으로부터 434년 전에 씌어진 것이다. 1998년 경북 안동시 정상동에서 이장을 위해 파묘한 옛사람 이응태(李應台, 1556~1586)의 무덤에서 나온 그의 아내가 쓴 한글편지다.
<원이엄마의 한글편지>로 이름지어진 이 편지는 가로 58cm, 세로 34cm의 한지에 빼곡히 한글로 썼다. 1586년 6월, 서른 한살 남편을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는 젊은 아내의 한서린 안타까운 심정과 남편에 대한 지고지순한 사랑의 감정이 편지글 행간 사이에서 배어나온다.

발굴 당시 이 편지와 함께 미투리(짚신) 한쌍이 한지에 싸여 시신 가슴께에 놓여 있었는데, 그 한지에는 ‘이 신 신어보지도 못하고’라는 글귀가 한글로 씌어져 있어 보는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이 미투리는 병석에 누운 남편의 쾌유를 빌며 아내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칼로 베어내 삼[麻]과 섞어 짠 신발이었던 것이다.

‘황소’의 화가 이중섭(李仲燮, 1916~ 1956)도, 6·25전쟁 중 가난 때문에 서로 떨어져 일본에 살던 일본인 아내와 어린 두 아들에게 보낸 절절한 사랑의 그림편지가 <그릴 수 없는 사랑의 빛깔까지도>(1980, 한국문학사)라는 서간집으로 엮어져 나오면서 세상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었다.

편지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시인 청마(靑馬) 유치환(柳致環, 1908~1967) 이다. 그는 경남 통영여중 교사 재직시 동료교사로 만난 이영도(李永道, 1916~ 1976) 시조시인에게 하루도 빠짐없이 20년간 보낸 5천여 통의 엽서를 통해 소위 ‘플라토닉 러브(순수한 사랑)’를 나누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38살 유부남과 29살 청상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의 마음이 담긴 편지들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 그 일부가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 (1967)라는 제목의 서간집으로 꾸며져 나와 장안의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세상의 화제가 됐었다.
‘사랑하는 것은/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청마 유치환의 시 <행복> 일부)

지금 <농촌여성신문>에서 효(孝)문화 확산의 일환으로 ‘가족사랑 손편지 쓰기’ 캠페인을 벌이고 있어 주목을 받고 있다. 지금이야 스마트폰 하나로 모든 게 소통되는 눈부신 세상이지만, 저 옛날의 손편지 만큼의 정감은 덜하다. 지금이라도 생각난 김에 부모님, 형제·자매 혹은 주위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온정이 담긴 손편지 한 통 써보는 건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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