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자수필-귀농아지매 장정해 씨의 추억은 방울방울

"곧게 뻗어 질러가는
세상 속 길에도
이렇게 더딘 길이 있다"

사라진 새벽잠에 일찍 눈 뜬 아침. 이리 둥글 저리 둥글 한참 자는 척을 한다. ‘콩과 보리를 불려 밥 지으려면 지금쯤 일어나야지’ 하며 잠자리를 걷고 하루를 시작한다. 오늘은 마을회관 노인회 총회가 있는 날이라 9시30분까지 도착하려면 좀 서두르는 게 낫다. 노인네들은 보통 시작 전 30분 정도 미리 와서 기다리기 때문에 신참인 주제에 늦으면 그건 너무 튀는 거다.

마을회관의 노인회장이란 직무를 맡았으니 마을에 대해 뭘 좀 알아야 되지 싶어서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고 걸어 갈 요량으로 일찍이 집을 나섰다. 찻길로 내려가지 않고 산 중턱으로 이어진 밭길로 들어섰다. 이 길이 더 빨라 보였다. 눈을 드니 멀리 산등성이로 보리밭이 푸르다. 보리는 이맘때면 눈에 파묻히고 서릿발에 솟구쳐져 보리밟기의 수난과 칼바람을 견딜 땐데 포근한 날씨에 웃자랐는지 새파랗다. 웃자라면 대가 실하지 못하다는데, 보리싹에게 겨울의 매서움은 시련이 아니라 정한 이치다. 사람도 그렇지만 보리도 저렇게 자라면 제구실이나 할런지.

휑한 겨울 들판에 느리게 휘어져 부드럽게 돌아나가는 밭둑을 따라가니 없는 듯 묻혀있던 산 밑 다랭이 밭들이 제 모습을 드러낸다. 콩을 심고 타작이 끝나고 말끔하게 정리된 것, 이건 갑수네 밭이다. 그 곁에 붙어 있는 박씨네 고구마밭, 작은 개울을 건너면 양대춘 할머니 고추밭인데, 팔순을 훌쩍 넘긴 우리 마을 대표가수다.

양대춘 할머니는 늘 ‘태평가’를 부르신다. “짜증을 내어선 무엇하나/ 성화를 받치어 무엇하나/ 속상한 일이 하도 많으니/ 놀기도 하면서 살아보세” 한글은 몰라도 노랫말은 똑 부러진다. 불러도 불러도 음정과 가락이 똑 같은 도돌이표다. 허리는 굽어지고 밥상머리 젓가락 장단에 맞춰 올리는 손가락 마디마디가 새끼줄 매듭처럼 울퉁불퉁하다.

곧게 뻗어 질러가는 세상 속 길에도 이렇게 더딘 길이 있다. 벼랑에 매달렸던 옛길이 아니라도 걷다보니 숨이 찬다. 멀리서 볼 땐 금방이지 싶었는데 급할 것 하나 없는 들길은 가도 가도 끝이 없다. 벌써 햇살이 한 뼘이나 마을 지붕위에 들고, 뒤편 은행나무 꼭대기의 까치들은 손님이 온다고 ‘깍깍’ 거린다.

마을 입구 첫째 집은 빈집이다. 대문짝 돌쩌귀가 빠져 나간 집마당. 무너진 담장 위로 지렁이 말라붙듯 담쟁이 줄기가 얽혀있고, 처마 밑엔 왕거미들이 진을 치고, 마른 대추나무 아래엔 빈의자가 주저앉았다. 창문은 부서져 바람이 넘나들고 두레밥상 위엔 흙먼지가 한상이다. 발자국 소리에 이웃 개가 쓸쓸히 짖고, 언제나 2012년 11월 달력에 세월이 멈춰 섰다.

할아버지 돌아가시기 전, 할머니가 요양원에 들어가시기 전엔 마당에 싸리비 자국이 선명했고, 빨랫줄에 흰옷이 까슬까슬하게 말라있었다. 두터운 복(福)자 밥사발과 수(壽)자 국대접에 밥 담아 할아버지 생신날 동네사람들을 초대하던 집이었다. 명절에 내려올 자식을 기다리며 마루가 반질반질 윤이 나던 파란대문집, 엉덩이 들이밀 자리만 있어도 푸성귀 심고 담벼락에 상추며 방울토마토를 심던 그 바지런하고 손때 매운 할머니는 지금은 가고 없고 얼굴만 어른거린다.

부랴부랴 회관문을 열어 보니 아무도 없다. 점심때나 오시려나. 설이라 아들딸네 집에 다니러 가셨는지 조용하다. 더 이상 석탄을 캐지 않는 탄광촌 같이 사람들이 훌훌 떠나버린 듯 썰렁하다. 이제 열댓 명 남은 노인들을 지키려고, 그 끈을 놓지 않으려고 나는 마음을 다잡고 마을 총회를 향한 발걸음을 재촉한다.

저작권자 © 농촌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