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CUS-‘WTO 개도국 지위 포기’ 득과 실

▲ 한국생활개선중앙연합회가 포함된 32개 농업인단체연합인 WTO 개도국 지위유지를 위한 농민공동행동은 개도국 포기 발표가 있던 지난달 25일에 상복을 입고 개도국 지위 포기 철회를 강력히 촉구하며 대응했다.

농민단체  “식량주권 포기로 농업 보호막 사라져”
· 농업 희생을 바탕으로 한 불균형 성장정책으로 농업은 아직 개도국
· 수입농산물 범람으로 우리 농산물 경쟁력 상실 자명

정부  “포기 아닌 개도국 특혜 주장하지 않는다는 것”
· 관세 등 개도국 특혜 당장 없어지지 않고 유지돼
· 이낙연 총리 “미래 협상에서 쌀 등 민감품목은 최대한 보호”

정부는 지난 10월25일 대외경제장관회의에서 “차기 WTO 협상 때부터 더 이상 농업분야의 개발도상국(개도국) 특혜를 요구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결국 개발도상국 지위 포기 발표다.
정부는 “새로운 협상이 시작돼 타결되기 전까지 기존 협상을 통해 이미 확보한 특혜는 변동없이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며 “당장 농업 분야에 미치는 영향은 없고, 미래 협상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영향에 대비할 시간과 여력은 충분하다”고 강조했다. 추후 또 다른 다자간 무역협상이 진행돼 합의가 이뤄질 때까지 우선 당장은 개발도상국 당시 적용됐던 관세와 보조금이 그대로 유지된다는 의미다. 

하지만, 시간문제일 뿐 정부의 ‘개도국 지위 특혜 요구하지 않는다’ 발표는 국내 농업과 농민들에게 머지않아 심각한 피해를 줄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정부의 이런 결정에 농업인들은 “WTO 개도국 지위 포기 철회”를 외치며 지속적인 투쟁도 불사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나섰다. 32개 농업인단체연합인 ‘WTO 개도국 지위유지를 위한 농민공동행동’에선 “개도국 지위는 농산물 시장 완전개방에 대응하고 피폐해진 농가경제를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였다”며 “우리 농업과 농민의 생존 위기를 고려하지 않은 정부 처사”라며 개도국 포기 철회를 주장했다.

농민공동행동은 개도국 지위 포기일인 10월25일을 ‘한국농업의 사망일’이라며 발표 당일 광화문정부청사 앞에서 상복을 입고 개도국 포기 철회를 목 놓아 외쳤다. 한국생활개선중앙연합회 김인련 회장은 “정부는 농산물 가격 폭락과 아프리카돼지열병, 태풍피해로 쑥대밭이 돼버린 농촌과 농민을 보듬어주긴 커녕 헌신짝처럼 내팽개쳤다”며 정부 처사를 강력히 규탄했다.
개도국 지위 유지 촉구결의안을 국정감사 중에 여야 만장일치로 발표하며 농업인 입장을 대변했던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위원장 황주홍)도 “정부 발표가 매우 잘못된 판단”이라며 “이제라도 정부가 초심으로 돌아가 개도국 지위를 유지해 줄 것을 촉구한다”는 성명서로 농민들 입장을 지지했다.

농민단체뿐 아니라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도 “공업 강국을 위해 희생해온 우리 농업은 여전히 개도국 수준”이라며  “정부의 60여 년에 걸친 불균형 성장정책으로 초래된 우리 농업과 농민의 생존위기를 정부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처사”라며 “개도국 수준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던 우리 농업의 현실을 정부는 직시해 개도국 지위 포기를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이런 개도국 지위 포기 철회 요구에 대해 이낙연 국무총리는 지난 10월29일 제46회 국무회의에서 “정부는 미래의 농업협상에서도 쌀과 같이 민감한 분야는 최대한 보호할 것이며 농업의 피해는 보전하겠다”고 밝히며 농민 달래기에 나섰다.

한국생활개선중앙연합회 유연숙 정책부회장은 “농업의 앞날이 캄캄하다”며 대책도 없이 개도국 포기를 먼저 발표한 정부의 처사를 비난했다. 유 부회장은 “기초농산물 수매제로 우리 농업인이 생산한 우리 농산물을 우리 국민이 소비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농업인의 안전 영농을 보장할 수 있는 대책을 반드시 마련해야 한다”며 “아울러 청소년부터 고령의 어르신에 이르기까지 우리 농산물 맞춤형 농산물 꾸러미 사업으로 우리 농산물 소비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현장농업인의 의견을 제시했다. 이밖에 여성농업인들의 안전영농을 위한 복지체계의 구축과 여성농업인 행복 바우처 확대 등 여성농업인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대책도 요구했다.   

▲ 면밀한 대책도 없이 개도국 지위포기를 먼저 발표한 정부의 처사에 농민들 분노의 목소리가 거세다.

농업보조금 감축 불가피…공익형직불제 대안으로

관세 낮아진 수입농산물, ‘기초농산물 수매제’로 대응해야

# 개발도상국 지위 포기로 잃게 되는 것은?

WTO 개도국 지위 유지와 포기하는 것은 우리 농업과 농업인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우선 농산물 시장 개방이나 농업인에 지원되는 각종 보조금과 관련한 규정이 달라진다. 선진국으로 분류되면 수입 농산물에 대한 관세를 낮추고 농산물 시장 대부분을 개방해야 한다. 게다가 수입 농산물과의 경쟁력 강화와 우리 농산물 가격 지지를 위해 지급하는 농업보조금에 대해서도 각종 규제가 생긴다. 특별품목 제도도 활용할 수 없다.

◆ 농업보조금 감축 불가피
우리나라는 농업보조총액(AMS)을 연간 1조4900억 원까지 쓸 수 있었다. 선진국으로 지위가 바뀌면 지급 한도는 약 7000억 원대로 절반으로 축소되리란 예상이다. 2019년 쌀 직불금 예산이 8000억 원 정도여서 쌀을 제외한 모든 보조금 지급을 중단하거나 쌀 직불금의 대폭적인 감액이 예상된다.
아직도 영세한 소농과 고령농이 70%에 달하고 20년째 농가소득이 제자리걸음이며 연간 200억 달러(23조5000억 원)에 육박하는 농산물 무역적자에 놓여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개도국 지위가 사라지게 되면 수입농산물 관세 감축에 따른 막대한 피해와 농업보조금 감축으로 이어져 국내 농업 생산기반 자체가 붕괴되고 농업농촌이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 현실이다.

더구나 정부가 이런 막대한 피해를 몰고 올 개도국 포기에 따른 피해 예측과 대책이 전무하고 농민들과의 소통을 위한 노력도 없었다는 게 농민들의 주장이다. 우리나라는 2004년 한·칠레 FTA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15건의 FTA를 52개국과 체결해 이행 중으로 수입농산물이 범람하고 농산물 값은 폭락해 식량자급률이 21%에 불과한 상황이다. 개도국 지위포기로 농업농촌의 경쟁력 약회는 불가피하다.

◆ 수입농산물 관세 낮아져
개도국 포기는 곧 특혜를 받고 있던 수입농산물에 대한 관세의 장벽이 허물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가장 큰 변화가 예상되는 분야는 쌀이다. 한국에서 생산되는 쌀 가격은 통상 국제 시세의 5배 정도라 정부는 쌀에 대해 513%의 관세를 부과하고 있다. 한국은 대신 일정 수준의 시장접근을 허용하기 위해 연간 40만8700톤의 쌀을 의무적으로 수입하며 관세를 유지해 쌀을 보호해왔다.
선진국으로 지위가 바뀌면 관세 범위가 현재의 절반 수준으로 수입쌀의 경쟁력이 대폭 높아질 가능성이 높다. 미국과 중국은 물론 베트남, 태국 등 주요 쌀 수출국도 추가 관세 인하를 요청할 가능성이 있어 쌀을 기반으로 한 국내 농업의 대폭 구조조정도 예상된다.

쌀 외에 채소와 과일 등에서도 큰 변화가 발생할 수 있다. 쌀 이외에도 민감품목으로 지정된 작목들은 고추 270%, 마늘 360%, 양파 135% 등도 특별품목으로 보호해왔다. 하지만 개도국 지위를 잃게 되면 장기적으로 이같은 관세율은 선진국 수준으로 조정될 수 밖에 없다. 쌀은 관세율을 최대 154%까지 낮춰야하고 고추는 81%, 마늘 108%, 양파 41% 수준이 예상된다.
경기침체로 인해 가처분 소득이 줄어들고 있는 저소득층의 경우 비싼 국내 농산물 대신 해외 수입품을 선호할 가능성이 높아 의외로 빠른 시기에 시설농업과 과수원 등에 대한 구조조정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게 경제전문가들의 예측이다.

# 개도국 포기 선언 왜 지금?
우리나라는 1995년 WTO가 출범할 때 개도국 특혜를 인정받았고 바로 이듬해 1996년에 선진국 가입이란 OECD 경제협력개발기구에 가입하면서 선택을 할 때 농산물과 기후변화 부분은 개도국 지위를 줄곧 유지 해왔다.

올해 미국은 중국과의 무역전쟁 중에 선진국이면서도 농업분야에서 개도국 특혜를 누리는 국가들을 겨냥해 개도국으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지난 7월26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WTO가 90일 안에 이 문제에 대한 실질적 진전을 이뤄내지 못하면 미국 차원에서 개도국 대우를 일방 중단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미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G20 회원국 ▲세계은행 분류상 고소득 국가 ▲세계 전체 무역량의 0.5% 이상 차지하는 국가 등 4개 기준을 구체적으로 제시해 이중 하나라도 포함되면 개도국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강경 입장을 밝혔다. 한국의 경우 미국이 제시한 4개의 조건 모두에 해당돼 정부는 현실적으로 개도국 지위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했단 입장이다.

전체 산업적 측면에서 WTO 개도국 지위를 포기할 경우에는 진행 중인 미국과의 자동차 관세, 방위비 등의 협상에서 개도국 지위 관련 논란을 없애고 유리한 고지를 만들 수 있다는 측면도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정부는 국익을 최우선에 놓고 우리의 국제적 위상과 경제적 영향 등을 깊게 고려한 결정이란 설명이다.

# 농민 요구와 정부 대책은?
정부는 결정을 농업의 체질을 개선하고, 미래 농업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새로운 출발로 삼아야 한다며 농림축산식품부·기획재정부 등 관계부처는 농업인들과 긴밀히 소통하는 체제를 가동하고 현장의 의견을 충실히 수렴해 정책에 반영하겠단 입장이다.
농민공동행동의 공동대표인 한국농축산연합회 임영호 회장은 “개도국 포기 결과를 받아들일 수도 인정할 수도 없다”며 “더구나 정부가 개도국 포기 결정 발표 전까지의 농민들과의 소통이 없었다는 점”이며 “포기 선언이 아니라는 주장하며 지금까지 받곤 특혜는 다음 회의 때까지 지속된다고 하지만 신뢰가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간 정부가 FTA나 한미, 한중 FTA 때도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왔으며 개도국 지위까지 포기한다는 것은 우리 농업을 포기하는 걸로 받아들인다는 입장이다.

정부는 개도국 지위 포기의 대책으로 공익형 직불제를 통한 농업의 체질 구조 개선을 들고 나왔다. 모든 작물에, 가격과 작물에 상관없이 단위 면적당 일정 금액을 지급하는 제도를 도입을 하기 위해 정부는 내년 예산에 공익형 직불제 예산 2조2000억 원을 편성했다. 무엇보다 농업이 식량생산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생태와 환경 보호의 역할을 하는 공익적 가치를 인정하고 국민과의 공감대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이외에 국내 농산물 수요 기반을 확대하기 위해서 농업소득보전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지만 이전 나온 대책들의 연장선이다.

또 정부는 개도국 지위 포기로 인해 농업생산기반의 붕괴를 우려하는 농민들을 미리 설득하고 협상하지 못한 책임도 있다. 경실련은 “농민들이 생존을 걸고 분노하고 있는 목소리를 무시해선 안된다”고 농민의 입장에서 정부를 향해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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