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희 칼럼 - 누리백경(百景)(103)

지난 2018년 작고한 정치인 김종필 씨가 글로 써서 남긴 증언록 <소이부답(笑而不答)>에 보면, ‘중앙청 철거와 YS(김영삼 대통령)의 역사관’이란 항목이 있다. 당시 ‘일제 식민잔재’로 지목된 경복궁 앞 중앙청(국립중앙박물관) 철거 비화가 그려져 있다.
-1993년 8월9일, 김 대통령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던 구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한다”고 발표했다. …이 건물을 김영삼 대통령은 소위 ‘민족정기 복원사업’이란 명분을 내세워 완전히 부수겠다고 했다.… 나는 YS와의 주례 회동에서 작심하고 이야기를 꺼냈다.

“국립중앙박물관 건물의 중앙홀은 1948년 출범한 제헌국회의사당으로 쓰인 역사적 장소입니다. 그 중앙홀 만은 부수지 말고 독립기념관으로 이전 하시지요.… 우리가 해방 됐을 때 가장 처음 태극기를 올린 국립중앙박물관 앞 국기게양대도 마찬가지 입니다.”
YS는 내 말에 “씰~데 없는 소리 마십시오.”라며 거절했다.… 결국 1995년 8월15일 지붕 위 첨탑 철거를 시작으로 구 총독부 건물은 해체돼 돌가루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그러면서 그는, ‘치욕의 역사도 역사다. 후세에 가르쳐야 할 교훈이다.’라고 글의 끝머리에 기록하고 있다.

당시 돔 모양의 푸른 중앙탑옥을 머리에 얹은 네오르네상스 양식의 동양 최대 근대식 화강석 건축물 ‘중앙청’은 그렇게 우리의 역사에서 사라져 갔다. 김종필씨의 회고처럼 부끄럽고 아픈 역사도 역사인 것을… 개인적으로는 그 미려한 건물을 그대로 존치해 후세대들에게 일제 식민통치의 잔학상과 우리의 암울했던 굴종의 역사, 그 본산의 실체를 눈으로 확인시키며 반면교사의 가르침으로 삼을 수도 있었을 것을… 하는 아쉬움도 가졌었다.

올해로 8·15 광복 74주년을 맞는다. 8·15는 분명 일본 군국주의의 패망과 함께 잃었던 나라를 되찾은 광복의 환희를 우리 민족에게 안겨주었다. 아울러 ‘식민잔재 청산’이라는 범국민적 과제도 남겨 주었다.
그런데 지금 이 나라 곳곳에서 관이 주도해 벌이고 있는 ‘일제 잔재 청산작업’에 온 국민들이 혼란에 빠져있다. 흡사 붉은 완장을 차고 선전·선동 하듯 일상으로 써 온 용어에까지 친일 딱지를 붙이려는 교육계의 시대착오적인 억지도 볼썽사납다. 나라를 위한다면서도 시대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나라를 망치고 있는 권세가들의 역사인식도 한심을 넘어 딱하기 그지없다.

굳이 일제 강점기 식민잔재로 치자면, 해방 후 이 나라 경제를 이끌어 온 굴지의 대기업들 상당수가 식민지시대의 일본기업들-즉 적산기업(敵産企業)들을 이승만 정부로부터 불하받은 친일자본가들이 키운 기업들이다. 맥주회사며 화약회사, 제과, 직물, 시멘트회사, 백화점…  등 이름만 대면 초등학생들도 다 아는 재벌기업들이다. 그러면 이 기업들도 청산의 대상인가?

뿐이랴. 해방 후 식민지 조선에 와 살던 일본인들이 내동댕이치고 빠져나간 ‘적산가옥’들도 이 나라 도처에 남아 있다. 이들을 지금의 우리들 눈 앞에서 없애버린다고 해서 지난날 한 시대의 아픈 역사가 영원히 통째로 없어지는 건 아니다.

세계사적으로 봐도 지나간 세기 동안에 대영제국과 스페인 무적함대, 프랑스의 정복지였던 나라들에서 피지배민족으로서의 아픈 역사의 자취들이 고스란히 남아 그 시대를 증언해 주고 있는 모습들을 보면,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이제는 진정 우리 국민 모두가 편견에 갇히지 않는 혁명적인 사고의 전환이 필요한 때다.
그래야만이 ‘나라의 격(格)’도 바로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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