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수필-귀농아지매 장정해 씨의 추억은 방울방울
"머리가 하얗게 센
민들레 머리가
풀밭에 가득하다"
구김살 없이 햇살은 쏟아지고 물오른 수목마다 그 이파리가 녹색으로 번져간다. 이제 피지 않은 꽃이 없고 잎이 나지 않은 나무가 없다. 새순이 잘 보이지 않던 은행잎도 딱정벌레처럼 동그랗게 새순이 다닥다닥 붙고, 제피나무의 자잘한 어린 새순은 반짝반짝 윤기가 난다. 뽕나무, 머루나무는 싹이 늦더니 한마디 새순이 솟을 때마다 아예 빨갛게 열매를 달고 나온다. 배나무도 꽃이 진 자리마다 송이송이 열매가 맺혔다. 지금부터는 본격적으로 배 적과(솎아주기)를 해야 하고 적과가 끝나면 봉지를 싸줘야 한다.
작년 한여름 극심한 더위에 에어컨이 고장나고 냉장고도 냉동이 되지 않아 고생한 것이 생각나서, 올 여름을 미리 준비하려고 남편이 적금 탄 돈으로 지난주에 둘 다 교체했다. 500리터 냉장고에 뭐가 그리 많이 차있었던지 버릴 것을 죄다 꺼내놓고 보니 마당 한편이 수북하다. 한낮 햇살이 뜨거워져서 새벽부터 일찍이 배 적과를 시작해야 하지만 냉장고 쓰레기를 먼저 치우기로 했다.
엊저녁부터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가 어룽어룽 거실 커튼에 그림자를 뿌리며 심상찮더니 오늘 아침엔 손이 시리다. 마당 온도계를 보니 영상 1℃. 자칫하면 겨우 콩알만큼 자란 어린 열매들이 냉해를 입는 건 아닐까 싶다. 농원이 산중턱에 있어 평지보다는 3~4℃ 온도가 낮지만 일교차가 너무 커 나무들이 잘 자랄지 염려된다.
하던 일을 멈추고 집안으로 들어와 아침밥을 먹고 다시 배밭으로 나갔다. 남편은 사다리를 타고 나무 위쪽 가지를, 나는 나무 아래 손 닿는 부분을 적과해 나간다, 한 무더기 중 가장 큰 것 하나를 남기고 나머지는 잘라내는데, 시작할 때는 집중을 하다가 어느새 생각이 다른 것에 팔리면 송아리 전체를 잘라먹어 만회할 수 없는 실수를 한다.
요즘 허리병(퇴행성 척추관 협착증)으로 주덕에 있는 통증전문병원에 치료를 받으러 가는데 2주일에 한번씩 3번 치료를 받으라고 한다. 한 번 갈 때마다 쌀 두가마니 값 정도의 치료비도 만만찮은데 주사바늘로 척추관절에 약물을 주입하거나 수십 대의 침을 찌르는 아픔도 견뎌야 하기 때문에 이제 마지막 세 번째를 남겨두고 그 생각에 빠져있다. 다행히 실손보험이 있어 치료비의 70%는 받을 수 있다하니 돈 문제는 그렇다 치고, 멈춘 듯 가는 세월에 퇴행하며 가는 몸이 얼마를 견디며 갈 수 있을지….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 같다. 같은 자세로 오래 있지 말라는 의사의 말이 떠올라서 배밭에 풀썩 주저앉는다. 머리가 하얗게 센 민들레가 풀밭에 가득하다.
어린이날 서울 사는 손자와 아파트 놀이터에 산책을 갔었다. 계단 틈에 풀밭에 보도블록 사이에 어디서든 민들레를 볼 수 있었다. 아무도 돌보지 않고 관심조차 없었지만 강한 생명력으로 구김살 없이 활짝 피어있었다. 그가 나지막이 말을 건넨다. ‘살아 있는 것은 신나는 일이야~ 자식의 자식을 만나고 그 눈을 들여다봐. 어여쁘지~ ’ 아침이면 꽃을 피우고 저녁이면 동그란 씨앗으로 바뀌어서 한줄기 바람에 다음을 기약하며 생명을 퍼뜨리려 날아간다.
민들레 동그란 씨앗줄기를 입에 대고 ‘후후~~’ 부는 건 어린이들의 최고의 놀잇감. 잘 날아 가기도 하고, 잘 날아가지 않으면 침까지 섞어가며 오리주둥이를 하고 ‘후~ ’ 불어대는 손자의 모습은 너무너무 귀엽다. 안 되면 “할머니, 잘 안 돼요.” 하며 울상을 짓다가도 다시 날아가는 홀씨를 보며 깔깔대며 웃는 손자가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윌리암 워즈워드가 그의 시 <무지개>에서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한 말이 떠오른다. 아마 어린이의 순수한 감수성을 높여 쓴 것이리라.
나는 주저앉은 배밭에서 민들레 홀씨를 날린다. ‘그래, 지금 나는 살아있지. 생명이 넘치는 오월을 살고 있는 거야.’ 가수 양희은의 ‘일곱 송이 수선화’를 입안에 흥얼거리며 나는 다시 적과 가위를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