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수필-귀농아지매 장정해 씨의 추억은 방울방울

삶은 매순간과의 결혼...
모든 것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아끼지 말자...

해가 조금씩 길어지나 보다. 해 뜨는 시각도 빨라져 날이 일찍 밝는다. 아침을 먹고 날씨가 좀 누그러진 듯해서 남편이 가지치기를 한 배나무 가지라도 주워볼까 마당에 나섰다. 꽁꽁 얼었던 강물은 녹아 기슭으로만 하얗게 살얼음에 덮여 있다.

집이 서북향으로 앉아 아직 해가 들지 않는 우리 농원엔 나뭇가지마다, 그리고 낮은 울타리 회양목 머리 위로 하얗게 은빛 서리가 내려 반짝인다. 다행히 바람이 없어 나무 가까이 다가가 보니 매실나무는 묵은 가지에서 빨갛게 새로 난 한 마디에 작은 꽃봉오리를 자잘하게 맺고 있다. 봄은 아직 멀게 느껴지지만 꽃봉오리를 보고나니 이 나무 저 나무 아래로 겨울 뒷뜨락이 궁금하다. 목련은 꽃이 큰 까닭일까... 봉오리도 제법 크다.

마른 들꽃의 풀씨를 먹으려고 참새들은 적막을 깨고 날아오르고, 새의 꽁지깃 같은 마른 고사리 잎의 구불거림과 질서정연함, 잎이 다 지고 빗자루를 거꾸로 세운 듯 가느다란 줄기에도 씨앗을 품고 있는 방앗대, 오가피 까맣고 둥근 씨가 가지 끝에서 바람에 위태롭게 흔들린다. 최선을 다해 꽃 피우고 마른 씨를 매달고 있는 야생들, 날벌레의 집요한 날갯짓으로 만든 단단한 고치, 혼신을 다해 제몫을 감당하는 저 무명의 고수들 앞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한겨울 가운데서도 생명의 의지는 더욱 굳세고 결연하다.

귀농하기 전 젊은 날, 서울서 살았을 땐 남들처럼 자식 키우고 먹고 사는 일에 매달려 열심히 사느라 만족을 모르고 살았다. 그땐 몸이 삶을 끌고 갔었다. 그런데 50대 후반에 귀농해 60대 중반을 넘기면서 이제사 인생이 뭔지, 어떻게 살아야할지, 무엇이 행복인지 눈곱만큼 알아가는 것 같다. 나그네 같은 삶에서 인생의 황혼, 인생의 겨울을 맞이하면서 어떻게 보내야할 지를 비로소 생각하게 됐나보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 성공이나 실패, 부자나 가난 등 젊어서 바라보던 가치는 이미 빛바래졌다. 일상의 날을 살아갈 기회가 줄어들고 있다는 생각은 그저 한 다발에 묶여가는 꽃이 아니라 한 송이로 홀로 서는 용기를 가르치고, 세상의 기대치를 맞추기보다는 본래의 나로 존재하는 나 자신이 되길 바란다.

우리에게 발을 걸어 넘어뜨리고, 방해하는 것조차 세상이 내미는 거친 호의쯤으로 받아들이며 부딪치며 걷게 한다. 노년은 몸의 낡아서 할 수 있는 일이 줄어들고, 삶이 불편해져도 이제는 생각이 몸을 이끌어 간다. 일상의 사물에도 존재의 의미를 찾아주고 친구가 된다.
작은 들풀과 벌레 한 마리의 존재도 소중하다. 아무리 작아도 생명의 존재의미를 알지 못한다면 신의 존재도 알 수 없을 것이다.

평범한 것들과 사랑에 빠지고 우리의 삶을 지지해 주는 사물들을 사랑하고, 우리를 받아주는 자연과 가정, 이웃이 있음에 감사하면서 일상의 회복, 평범한 것들에 대한 특별한 느낌, 내 옆에 늘 있어준 것에 대한 감사가 우리의 겨울나기의 주제다.
우리 삶은 매순간과의 결혼이다, 모든 것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아름다운 것은 아무것도 아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저작권자 © 농촌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