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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은 행복을 위한 마중물일 뿐…■제2회 농촌 스토리 공모 최우수상 수상작-정경숙 씨의 ‘바위 틈 소나무의 여로’
이희동 기자  |  lhds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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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6.29  08:5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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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큰 화재에 모두 소실된 다육식물은 2년간 각고의 노력 끝에 다시 활기찬 생명력을 뽐내고 있다.

본지는 농촌지역에 전승돼 오거나 회자되고 있는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발굴·수집해 농촌문화 콘텐츠 자원을 확보해 이를 바탕으로 스토리텔링 소재를 제공하는 농촌 스토리 공모를 실시하고 있다. 이번 호에는 제2회 농촌 스토리 공모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한 경남 함안군 정경숙 씨의 글을 싣는다.

자식처럼 아꼈던 다육식물, 한순간 화재로 사라져
이런저런 시련 겪으며 살아온 인생 돌아봐
오로지 배움의 욕구로 자식뻘 학생들과 학교 다녀
농촌교육농장 통해 아이들에게 자연과 건강 일깨워

여행을 이야기할 때 ‘길가메시 서사시’나 ‘서유기’, ‘동방견문록’등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무언가를 발견하고 새로운 경험을 하기 위해 길을 나선다. 삶의 촉매제를 얻는 과정이기도 하다. ‘Travel’은 고통 혹은 고난을 뜻하는 라틴어 ‘Travail’에서 왔다. 지금의 여행과 고대의 여행은 교통수단 면에서 이미 고난을 수반했었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과정에서 참 여행의 뜻을 우리의 여로에서도 고통 없이 얻는 성숙한 삶은 많지 않을 것이다.

2017년 1월19일 강서구청에서 설 명절 농산물 판매 행사를 한다고 전 날 오후 늦게 서울에 갔다. 결혼하기 전 서울에서 생활했지만 오랜 기간을 지방에서 살다 보니 서울 길이 낯설기만 했다. 겨우 숙소를 구하고 일행들과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면서 하루 밤잠을 청해 보았지만 지나가는 취객들의 노래 소리, 오토바이 소리에 쉬 잠들 수 없었다.

(옛날에는 어떻게 서울에서 살았지?) 혼자 중얼 거렸다. 벌써 조용한 집이 생각났다. 기상 시간을 맞춰놓고 잤지만 숙소 위층에서 배관을 타고 내리는 물소리에 화들짝 놀라 깼다. 늘 바삐 사는 것이 일상이 되어 버린 나, 특히 이런 행사에 처음 참석하는 것이어서 전날 상품도 만들어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 이틀 동안 집에 있는 가족들 반찬이며 간식이며 조금이라도 덜 불편하게 하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정작 나의 소지품들은 몇 개 빠트리고 왔다. 헤어드라이기를 써 보려고 했지만 벽에 바짝 붙어 있었고 화장실에 있는 비누는 주먹 안에서 잡히지도 않을 만큼 작았으며 누런색의 플라스틱 컵이며 붉은색의 커튼까지.

암튼 상품이 얼마나 판매가 될지도 모를 뿐더러 행사장에서 가까운 거리에 숙소를 정했으니 좋고 나쁘고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그럭저럭 새벽 6시 30분, 짐을 받으러 행사장에 갔다. 10년을 이렇게 전국 행사장이란 행사장은 가지 않은 곳이 없을 만큼 오랜 시간을 길 위에서 버텨 오신 성공한 이웃농가의 대표님께서 하시는 대로 따라만 하니 크게 어려운 점은 없었지만 모든 것이 어색하고 몸에 착 붙지 않았다.

고맙게도 농업기술센터의 도움으로 짐은 별도로 배차해 주셔서 우린 몸만 왔으니 짐을 받아서 내리고 우리 자리를 찾아 상품을 진열하고 잠시 허리를 펴는 순간 전화가 왔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아들의 목소리에서 나의 팔 다리에 갑자기 힘이 쫙 풀려 버렸다. 어제 밤 안부 전화를 서로 주고받은 터이고 아직 기상 시간이 아니지 않은가?

순간 말을 하기가 덜컥 겁이 났다. 아들의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올까.

떨리는 목소리가 이어지면서

“어머니~ 집에 오셔야겠습니다.”

“왜?”

“그냥 와보시면 알아요~”

“아버지가 다치셨니?”

“아니요....”

“그럼 네가 다쳤니?”

“아니요...”

“그럼 왜~~?”

아들의 목소리는 눈물로 젖어 있었다. 마치 솜 천근이 물에 젖은 것처럼.

“다육식물원에 불이 났어요.”

“..............”

“다친 사람은 없니?”

“네”

“근데, 모두 전소 되었어요.”

“....................”

“어떡하니, 하는 수 없지. 아버지도 너도 엄청 놀랐겠다. 사람 다치지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해라. 곧 바로 내려갈게.”

말은 그렇게 태연하게 했지만 그때부터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통화하는 것을 듣고 계시던 이웃농가 대표님들이 여기 물건들은 걱정 하지 말고 빨리 집에 가라고 하셨다. 우리가 판매하는데 까지 판매하고 나머지는 알아서 챙겨 갈거니 빨리 가라고 야단이셨다.

큰길을 찾아 나와서 터미널로 가는 길을 건너야 하는지, 그 자리에서 타야 하는지 머릿속은 하얗고 발은 땅을 딛고 있는지도 느낌이 없었다.

허겁지겁 터미널에 도착하니 마침 마산 가는 버스가 5분 남겨 놓고 있었다. 서너 시간 동안 고속버스 안에서 오만가지 지나간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그 다육식물들이 우리 부부에게는 그냥 다육식물이 아니다.

유방암 수술을 하고 퇴원하는 날, 남편이 나에게 다육식물을 선물한 4포트가 지금의 약 5000포트가 넘는 이 아이들을 보면서 5년 생존율의 살얼음판을 딛는 기분으로 투병생활을 잘 견뎌 낼 수 있었고, 남편은 동·식물의 전문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기에 14년을 밤낮으로 틈만 나면 사랑을 쏟아 부었던 아이들이라 그 어디에서도 쉽게 보거나 구입할 수 없을 만큼 신기하고 멋진 아이들이었다.

체험을 하러 오거나 방문하시는 분들을 들뜨고 가슴 벅차게 했던, 감탄을 하게 했던 식물들이다. 자식만큼이나 아끼고 사랑했던 식물들을 눈 깜빡할 사이에 화염에 휩싸여 사라지는 광경을 목격했을 그날 밤 우듬지 너머로 밀려오는 허탈함을 헤아리기 쉽지 않았다. 얼마나 낙담을 하고 놀랐을까?

   
▲ 화마가 휩쓸고 간 자리에 끈질긴 생명력으로 다시 새순을 틔웠다는 바오밥나무.

인간사 차~암 얄궂다.

어떤 이는 한 평생 정말 평탄하게만 잘도 사는데 난 도대체 이게 몇 번째인가?

1987년 태풍 셀마는 결혼 이후 가장 먼저 겪은 상흔이다. 돈사가 무너져서 수 백 마리의 돼지들이 압사하고 후유증으로 축협에 밀린 사료대금 때문에 양돈업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그 후 사슴 사육으로 바꾸면서 형편이 조금 나아졌으나 2002년 태풍 루사와 2003년 태풍 매미는 우리 삶을 시험에 들게 하였지만 대장장이의 무쇠 담금질처럼 우리를 강건하게 만들었다. 함안은 낙동강의 수위와 밀접하다. 사슴들의 목까지 물이 차 올라오니 울타리 안에 갇혀있던 사슴들을 저렇게 두었다가 모두 죽일 것 같아 산으로 풀어 주었다.

이 뿐이 아니었다. 집이 침수되니 가재도구며 옷가지 등 모든 것들을 세탁하고 뒷정리하는 과정이 전국으로 방송되었고 산으로 둘러싸인 지형이라 모든 교통수단이 없으니 오로지 산길이나, 작은 보트로 아이들의 등하교와 식수며 식량을 수송했다. 2006년은 시리도록 아프고 힘들었지만 다시 태어난 해라고도 할 수 있다.

각종 매체에서 암환자 얘기들이 수 없이 많이 방송이 되었건만 다른 사람의 다리 부러진 것 보다 내 손톱 밑에 박힌 가시가 더 아프듯이 암은 나랑은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으로 알았다.

많이 당황하고, 많이 슬퍼하고, 많이 우울해하고, 많이 의기소침해 하고, 엄청난 스트레스와 힘든 투병생활은 다시금 나를 돌아보고 생각할 겨를을 주었다.

일 년에 한 두 번씩 서랍장 정리 하듯이 내 삶의 정리도 해 보았다. 그 동안은 앞만 보고 달리지 않았던가?

살얼음판의 4년이 지난 어느 날, 의사선생님께

“이 약 그만 먹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부작용이 민만치 않았다.

의사는 퉁명스럽게 “그럼 드시지 마세요. 우리도 이 약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

그렇게 의사가 미운 적은 없었다.

그때부터 숨어 울던 나의 배움의 욕구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농촌관광대학, 시 낭송, 동화 구연, 원예치료사, 체험교육농장교사, 아동요리지도자, 도형심리상담사, 전통음식학교, 미술심리상담사, 건강가정사, 사회복지사, 보육교사, 식 교육리드과정, 식품제조 가공과정, 발효음식 제조과정, 향토음식연구회, 우리음식연구회, 청소년수련 활동 인증, 팜파티 플래너, 평생학습 행복강사 자격 등 관심분야의 대부분 교육을 받았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일까? 내가 즐겁게 일 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일까? 일을 하면 행복해 했던 것은 어떤 것이었나?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무엇을 잘한다고 했더라?

다시 태어난 나의 삶의 방향은 어떤 것일까를 생각한 나머지 실팍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가지고 있는 이런 구슬들을 꿸 수 있는 것은 체험교육농장이었다.

2013년 쉰다섯의 나이로 함안에서 출발해 부산에 있는 대학까지 77.55Km, 주유비 9000원, 교통비 2700원, 1시간 14분을 왕복으로 달려 일주일 동안 4일을 꼬박 2년을 다녔다.

늦깎이 공부, 많이도 망설였고 곱지 않은 시선을 처리하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었지만 무엇보다 맘 편치 않은 것은 힘든 농장 일을 남편에게만 맡기고 쓸데없는 허영기(?)로 채워진 나의 욕심이 가끔은 나를 움츠리게도 하였다. 그럴수록 좀 더 일찍 일어나서 집안일들을 챙겼고 수업이 끝나자마자 쏜살같이 달려와 못한 농장 일을 처리하고 밤이면 서툰 자판과 씨름하면서 제출해야 했던 리포트와 과제물들, 어느 것 하나도 소홀할 수가 없었고 무더운 여름 날 늦은 오후 고속도로 위에서 노래도 불러보고, 큰 소리로 숫자를 세어도 보고, 뺨도 때려 보았다. 시도 낭송 해 보아도 쏟아지는 졸음운전으로 아찔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나의 아들과 딸보다도 한참 어린 친구들과 공부한다는 것이 부담도 되고 나로 인하여 젊은 친구들이 혹여 불편할까봐 열심히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기억력은 훨씬 뒤떨어지지만 이해력은 조금 앞서서 천만다행이었고 푸짐한 도시락 반찬과 가끔은 특별한 음식들을 학우들과 나누어 먹는 재미도 쏠쏠했다. 나보다 나이가 훨씬 작은 교수님 모두모두 만학도인 나를 많이 챙겨주셔서 지금 생각해도 감사하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졸업할 때는 전체 수석의 영광도 안아보고 내 생애 최고의 날, 내가 정말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비록 명문대는 아니지만 나의 수준에 맞고 내가 필요한 학문을 즐겁게 배웠으면 최고의 대학이 아닐까?

아이들의 발달심리를 이해하고, 봄에는 어떤 주제를 가지고 배우며, 24절기에는 어떤 형식을 가지고 수업을 하는 지가 몹시 궁금했고, 무엇을 주제중심 통합교육이라 하는지, 또한 아이들을 사랑하고 존중하고 이해하는 것이 우선일 것 같아 그리도 모질게 부산을 오갔다.

덕분에 체험교육농장에 대한 입소문은 금방 선생님들의 입소문으로 퍼져 나갔고, 함안군 농업기술센터와 경상남도 농업기술원의 도움으로 지금의 다육 식물원을 우리의 아이들과 일반인에게 오롯이 내어주게 되었다.

우리가족에게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다육식물원을 잃는다는 것은 팔이 하나 잘려 나가는 아픔보다 상처가 더 깊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택시를 타고 집에 도착해 보니 화마가 할퀴고 간 자리는 생각보다 참혹했다. 잔해를 치우느라 지인들과 수많은 사람들이 그 추운 날씨에 여간 고생이 아니었다. 가족회의를 했다. 이 체험교육농장 사업을 해야 할지 그만둬야 할지를.

14년 동안 우리가 얼마나 식물들에게 애착을 가졌었는지 너무도 잘 알기에 끊이지 않고 격려차 오셔서 안타까워 어쩔 줄 모르는 지인들, 영문도 모르고 방문하신 손님들의 걱정과 염려, 재건하는데 조금이라도 보태라며 두고 가신 금일봉들, 한 젊은 새댁은 선인장이 모두 불타고 없으니 얼마나 서운하겠냐며 재봉틀로 패브릭 선인장을 만들어 세워놓고 갔다. 심지어 세 아이를 둔 예쁜 새댁은 그리 넉넉지 않아 보였는데 귀가하면서 지갑에 있던 문화상품권 한 장을 기어코 내어 놓고 눈물을 글썽이며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은 점차 분명해져 갔다. 그 상품권은 모서리가 닳아서 헤졌지만 아직도 쓰지 못하고 지갑 속에 간직하고 있다.

또 한 친구 잊을 수 없는 사람, 갑자기 돈 만들기 쉽지 않을 것이라면서 대한이라 동장군의 기세가 심상치 않으니 한 시간이라도 빨리 교체하라고 간곡했다. 하루빨리 비닐을 교체하라면서 거금을 너무나 기쁘게 주고 갔다. 조금이라도 꼭 도움이 된다면 자기가 도리어 행복하다고, 친구를 위해서 쓰는 것은 하나도 아깝지 않다고.

우린 언제 이 모든 것들을 갚을 수 있을까 무거운 어깨위에 걱정 하나가 더 얹혀졌다.

그래, 좀 힘들고 어렵더라도 이 식물원을 포기 하면 안 되겠다는 것과 이순이 다 되어가도 배우고 또 배우는 것이 인간사인 것을 실감하고 마음을 결정하고 나니 오히려 편안해졌다.

그 동안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하고 식욕도 없던 아버지와 아들도 조금씩 나아지는 듯했다.

죽은 식물들과 화염의 잔해들을 치우는데도 엄청난 경비와 인력과 에너지가 들어갔고, 4월이면 아이들의 현장체험 나오기 전에 모든 걸 마무리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했다. 한 포기라도 더 살리려고 애를 써 보았지만 소방서 살수차에 맞은 다육식물 들은 시간이 지나고 나면 영락없이 죽고 말았다. 제 아무리 비싼 아이들이라도 한 순간이다. 다육식물뿐 아니라 이 세상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니 지나친 애착은 잘못된 것이란 생각으로 다짐을 하고 또 해 보았다.

3개월 동안 복구에 전념한 터라 가족 모두 지치고 힘들었지만 사무실도 새로 짓고 모든 집기며 도구들도 새로 구입하고, 새로운 식물들이 들어오면서 분위기는 반전이 되고 오동통하고 건강한 다육식물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 동안의 모든 시름은 온데간데없다. 웅장하고 비싼 아이들은 예전만 못 하지만 다시 찾아 주신 방문객들과 지인들은 식물원의 원목 테이블에 앉아 진한 커피향을 맡으며 쉴 수 있는 공간을 사랑하고 행복해 하니 이 이상 더 바랄게 없다.

연간 약 5000명 정도가 다녀가는 공간을 어떻게 하면 좀 더 안락하고 아름답게 꾸며서 우리가 받은 그 사랑을 돌려 드릴까를 항상 고민하고 있다.

특히 요즘 뉴스나 사건 사고에 청소년들의 관심과 아픈 마음들을 조금이나마 들어 주고 가볍게 해주는 일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를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하다. 이런 일들은 풍부한 물질보다는 풍족한 사랑과 배려와 관심이라고 생각한다.

자존감이 낮은 아이들에게 식물을 보살피게 하고 꽃을 기르게 하면 자신을 훨씬 더 사랑하게 되고 친구를 배려하게 되고 내가 누군가를 돌봐야 한다는 책임감 또한 길러진다.

가끔 체험하러 오는 아이 중에서 폭력성이 강한 아이,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장애를 가지고 있는 아이들도 넓은 잔디밭에서 그늘지고 아팠던 구석구석을 따사로운 햇살에 펴 말리고, 맘껏 뛰어놀고 맘껏 소리도 질러보고 한 바가지 땀도 흘리고 나면 이내 화사한 얼굴로 변하고 눈동자는 수정같이 빛이 난다. 내가 체험교육농장을 운영하는 생각은 결코 단어 하나, 숫자 하나 더 알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서 그냥 아무런 대가 없는 계산이 결국은 맘껏 뛰어놀게 하는 것이다.

자연과 하나 되는 것, 자연과 동화되는 것, 이것만이 유일한 치유방법이며 사회적 비용이 덜 드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 자연 속에서 보낸 어릴 때의 아름다웠던 추억들은 세포 사이사이 켜켜이 쌓여 스며들었다가 힘들고 어려울 때 꺼내 쓸 수 있는 마중물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우선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은 사회를 아름답게 하는 일에 발을 살짝 얹어 가지고 있는 자원과 재능으로 조금 보태고 싶다.

아이들에게 물질만능주의의 삶에서 이제는 가치 있는 삶이 어떤 것인지 어떻게 하면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아 갈 수 있는지,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를 알려줄 수 있어야하고 알려주어야 하는 우리 사회와 어른들에게 절체절명의 시간이 돌아왔다. 또한 나는 늘 농장에 오는 아이들에게 마음을 건강하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는 건강한 먹거리를 먹는 것도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비싼 음식이 아니라 건강한 음식을 먹자고, 너무나 철없는 음식들이 난무하니 사람도 철이 없어지는 것 아니냐고.

2009년부터 쉼 없이 틈만 나면 하나씩 주워놓은 구슬들을 꿰어 지금의 나를 있게 하였고 그 중 가장 의미 있었던 것 중 하나는 한국생활개선중앙연합회에서 주최한 건강하고 바른 먹 거리를 위한 행사의 일환으로 ‘농맘’ 브랜드 콘테스트에서 당당히 인증 받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아마도 농맘이 제 마음과 같았고 발효음식과 건강한 음식에 대한 저의 평소 마음을 농맘이 알아주시지 않았나 하는 맘에서 살아 갈 날이 살아 온 날 보다 짧을 것 이지만 살아가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기에 고맙다.

소나무의 씨앗 두 개가 바람에 날려 하나는 옥토에 떨어졌고 다른 하나는 산속 바위틈에 떨어졌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좋은 땅에 떨어진 솔 씨는 쭉쭉 커가면서 윤기가 나고 반질반질하여 많은 다른 소나무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지만 바위틈에 떨어진 솔 씨는 엄청난 고통과 목마름으로 제대로 자라지도 못하고 옹이와 수형이 뒤틀어지고 근근이 간신히 죽지 못하여 살아 왔다. 그런데 어느 날 거센 폭우와 폭풍이 휘몰아 쳐 좋은 땅에서 자란 소나무는 그만 뿌리 채 뽑혀버렸지만 너무나도 모질고 혹독한 인고의 세월을 안간힘으로 버틴 작고 못생겨 휘어졌지만 수형이 비틀어진 소나무는 낙락장송이 되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는 얘기도 있듯이 그 동안 살아온 나의 삶도 다르지 않길 바라면서 오늘도 체험 오는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쓸고 닦는다.

   
▲ 담금질을 하면 단단해지는 쇠처럼 온갖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 지금의 동동바구농장을 일궈낸 정경숙씨.

■현장인터뷰

“넘어지면 다시 일어서는 게 우리의 인생살이죠”

배움의 열정으로 다시 일어나
작지만 확실한 행복 누려

비가 많이 내릴 때면 으레 물이 넘쳐 집 앞 바위만 동동 떠서 농장 이름을 동동바구(바구는 바위의 경상도 사투리)라고 지었다는 정경숙 씨. 농장은 통나무집, 드넓은 잔미마당, 수백 가지 다육식물과 블루베리, 그리고 목공소와 사슴까지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동동바구농장은 수십 년간의 시련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세운 그만의 행복한 왕국이라고 소개했다.

“1979년 남편이 제대 후 좁디좁은 오솔길만 있던 이곳에 터를 잡은 게 우리 농장의 시작이었어요. 큰 꿈을 갖고 시작했지만 가시밭길 같은 시련의 연속이었어요. 경남에서 많이 짓는 단감농사를 했지만 기후에 맞지 않아 실패했고, 양돈은 3년 동안 두 번의 태풍으로 큰 빚만 졌을 땐 정말 살고 싶은 맘이 싹 사라졌었어요.”

허나 시련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TV속 남의 일이라고 여겼던 암 판정을 받고 시작된 기나긴 투병생활, 암 수술 후 남편이 선물한 다육식물을 자식같이 애지중지하며 키웠지만 지난해 1월 하우스가 전소되는 일도 겪으며 마치 사지가 잘려나간 아픔을 느꼈다는 정경숙 씨.

남들은 평탄하기만한 인생을 살게 해주면서 어찌 하늘은 유독 나에게만 이런저런 시련을 안겨주는지 원망하고 또 원망했다. 하지만 원망은 결코 답이 될 수 없었다. 넘어졌으면 다시 일어서는 게 인생사라고 생각하니 한 줄기 빛이 보였다. 바로 배움에 대한 열망이었다.

음식, 인성, 관광, 체험, 복지 등 관심 있는 것이라면 어디가 됐든 배우자는 열정은 갓 스물을 넘긴 자식뻘 학생들과 함께 부산의 한 대학에 입학했고 수석으로 졸업하는 영예도 안았다. 그리고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이듯이 그가 배운 것들을 활용할 수 있는 곳이 체험교육농장이었다.

“도통 쉴 틈이 없는 게 요즘 애들이죠. 그래서 우리 농장에서 만큼은 아무 대가 없이 맘껏 뛰어놀았으면 하는 곳이 되길 바랐어요. 따사로운 햇빛 받으며 드넓은 잔디밭에서 동물도 보고 식물도 만지며 자연을 함께하면 자신을 사랑하고 가족을 아끼고 친구들과 어울리며 그 무엇과도 바꾸지 못할 추억을 쌓았으면 하는 게 제 가장 큰 소망이에요.”

이제 블루베리 수확과 체험 스케줄이 제일 많을 때라 눈코뜰새 없지만 돈보다는 행복과 보람을 위해 일한다는 그이기에 그리 힘든 줄도 모른다고. 요즘 여기저기서 나오는 작지만 확실한 행복 ‘소확행’을 진정으로 누리고 있는 이가 정경숙 씨가 아닐까 싶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 길, 다육식물이 커가는 하우스에 우뚝 서 있는 족히 3미터는 넘을 바오밥나무 한 그루가 눈에 띄었다. 지난해 화마가 휩쓸고 가며 당연히 죽었겠거니 싶었던 놈이 다시 새순을 틔웠을 때 그 감동을 잊지 못한다는 정경숙 씨. 시련 속에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았던 그와 그 바오밥나무의 끈질긴 생명력은 무척 닮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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