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명견 교수의 재미있고 유익한 옷 이야기(37)

▲ 4․27 남북정상회담 때 김정숙·이설주 두 퍼스트레이디의 샤넬라인 스커트.(사진출처/2018남북정상회담 홈페이지)

세월이 달라져도 변함없는
품위의 스커트라인…
그게 샤넬라인의 경이로움

샤넬(Gabrielle Bonheur Chanel)은 프랑스의 전설적인 디자이너이다. 타임지에 기록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의 인물 중 유일한 패션 디자이너다. 그러나 화려한 성공 이면에는 불우한 어린 시절이 있었다. 12세에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로부터 버려져 보육원과 수도원을 전전해야했다. 시골마을에서 바느질하는 노동자로 일했고, 가수를 지망해 카바레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성장한 후로는 그녀 곁에 언제나 남자가 있었다. 그 남자들이 그녀의 인생 역전에 밑돌을 놓아줬다. 남자 친구의 별장 파티에서 그녀가 만들어 쓴 모자에 관심이 쏟아지자, 그 남자친구의 도움으로 모자 가게를 열었다. 그녀의 천재성이 빛나기 시작했다. 또 다른 영국 출신 사업가를 만나, 그의 후원으로 파리에 ‘샤넬 모드’를 오픈하고 모자뿐 아니라 드레스도 만들었다. 코르셋을 입지 않아도 되는 실용적이고 활동적인 드레스를 선보였다. 특별히 운동복이나 속옷의 소재로 활용하던 저지(니트처럼 짠 신축성 있는 직물)를 겉옷에 사용했다. 활동성이 좋아 당시 떠오르던 여권 신장 운동과 맞물려 대박을 쳤다. 1910년대와 1920년대를 흔들어 놓았다.

샤넬 No.5도 만들었다. 이 향수 역시 대성공이었다. 가난한 고아 출신이 귀족과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극작가 장 콕토, 화가 피카소, 살바도르 달리, 작곡가 스트라빈스키 등)과 인맥을 쌓으며 성장가도를 달렸다. 아무도 시도하지 않던 검정색 드레스를 내놓아 엄청난 사랑을 받았으며, 무릎까지 오는 활동적인 슈트(상하의를 같은 천으로 만든 한 벌의 옷)까지 만들었다. 1930년대도 샤넬룩으로 장악했다. 1939년엔 약 4000명의 노동자가 일하는 대기업으로 성장했으나, 노동조건에 항의한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에 충격을 받고 샤넬은 은퇴했다.

그리고 15년간 그녀는 프랑스의 패션계를 떠났다. 그 사이 독일군 나치 장교와 사랑에 빠지는 ‘과오’를 저지른다. 이 때문에 전쟁 후 샤넬은 첩자로 몰려 그 명성이 바닥을 치고 스위스로 떠나게 된다. 그러나 1954년, 그녀는 나이 70에 패션계로 컴백해 구두와 백까지 만들어 다시 세계적으로 사랑을 받는다. 샤넬은 천재였다. 1955년 울 소재의 새로운 샤넬 슈트를 발표했다. 1920년대의 슈트와 같다는 비난도 있었으나 세계의 여성들이 여전히 환호했다. 1960년대 중반 미니스타일이 세계를 휩쓸 때, 샤넬은 그 때까지 이상적인 스커트 라인이라고 했던 샤넬 라인(무릎 아래 5~10㎝)을 굳건히 지키며, ‘정숙하고 우아하고 품위 있는 여성의 스커트 라인’으로 각인시켰다.

샤넬은 1971년,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나치 장교와의 사랑’ 때문에 그녀는 조국 프랑스에 묻히지 못했다. 스위스 로잔에 그의 묘지가 있다. 샤넬의 탁월함은 불편하고 정형화된 옷 속에 갇힌 여성들을 해방시킨 혁명에서 시작됐다. 그러면서 전형적인 고급스러움과 격조를 나타내는 게 샤넬의 이미지다. 지난 4·27 남북정상회담 때 김정숙·이설주 두 퍼스트레이디의 스커트 라인이 바로 샤넬라인이었다.

유행을 따르는 것 같으면서도, 대를 내려 입어도 되는 옷, 그게 샤넬의 불가사의다. 세월이 달라져도 변함없는 품위의 스커트라인, 그게 샤넬라인의 경이로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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