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수필-귀농아지매 장정해 씨의 추억은 방울방울

꽃보다 오히려
연둣빛 새순이
바람에 일렁이는 게
더 황홀하다…

새벽 5시만 지나면 먼동이 트고 창밖이 훤해지면서 하루가 시작된다. 봄날의 하루 일은 한 해 농사를 좌우하는 터라 새벽부터 길바닥에 붉은 흙덩이를 떨구며 트랙터가 오가고 묵은 밭을 갈아엎는 굉음이 아침공기를 잘게 부순다. 땅을 갈아 이미 멀칭이 끝나서 감자며 옥수수를 심은 밭은 거대한 비닐바다를 이루고, 바람이 불어 밭을 가로지르면 마치 파도가 일렁이듯 비닐이 물결친다. 오늘은 아침에 먼저 해야 할 일들로 시간을 쪼개고 점심 후엔 더 늦기 전에 봄소풍을 갈 생각이다. 어제 일궈 놓은 밭에 땅콩을 심고 오미자 덩굴 아래 부직포를 깔아 풀이 나지 않게 덮고 겨울추위에 얼어 죽은 매실가지를 정리하려 한다. 그리고 오후엔 뒷산 너머 골짜기로 오랜만에 한 번 가보자고 남편에게 말할 참이다.

우리 집은 귀농 후 산야초 발효액을 담가왔다. 도시에 살다가 쑥과 냉이도 잘 모르던 나는 산야초 책을 모조리 사다 읽으며 동네 어르신을 따라 다녔다. 산에서 나는 풀과 꽃들 중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약초와 독초 등을 배웠다. 귀농 초기엔 온 나라에 발효액 붐이 일어 우리는 아침마다 산책 겸 산으로 들로 다니며 산야초를 채취했었다. 그런데 그 후로 발효액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고 새로운 효소제가 많이 등장하면서 빛바랜 유행처럼 사라졌다. 아울러 우리도 산야초를 채취하는 일이 점점 줄어들게 됐고 몇 년 전만해도 날마다 오르던 뒷산을 근래 한 번도 가보질 못했다.

점심을 먹고 느즈막에 남편과 뒷산 골짜기를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노루가 만들어 놓은 좁고 낮은 길을 따라 가파른 산길을 몇 차례 쉬어가며 오른다. 숨차게 고개 마루에 오르면 진달래 붉은 꽃 물결이 골짜기 바람에 불어 오르고, 다시 노루 길을 따라 장화가 발목까지 빠지는 푹신푹신한 낙엽 쌓인 길을 미끄러지듯 골짜기로 내려간다.
멀리서 보면 산과 산이 포개져 있어 그곳에 그런 넓은 골짜기가 있을까 싶을 태초의 자연이 펼쳐진다. 마치 제주도의 원시림같이 이끼 낀 돌, 여기 저기 쓰러져 썩은 나무들, 희고 늘씬한 은사시나무, 하늘거리는 연둣빛 잎새, 자작나무 군락과 막 올리브색으로 온몸에 문신한 젊은 떡갈나무, 소나무 짙은 초록에 골짜기는 사방이 연둣빛으로 에워싼 비밀의 정원이다.

여기가 내가 사는 곳이 맞나? 머리 위론 푸른 하늘 한 점이 키 큰 나무 가지에 달려 있고 나는 봄 우물에 푹 빠져 버렸다. 뽑힌 나무뿌리에 이끼가 붙고 어린 풀이 나고 그 가장자리에 빨간 새순이 돋은 담쟁이가 둥글게 띠처럼 감겨 있는 모습은 어떤 사람도 흉내 내지 못할 고상하고 우아한 연륜을 연출했다. 이끼 낀 돌 틈으로 은방울꽃 외떡잎 싹이 도르르 말려 군락을 이루고, 벌깨덩굴 아래 현호색은 연보랏빛으로 피어 난장이다. 진보랏빛 오랑캐꽃, 손톱만 해도 있을 것은 다 갖춘 노오란 양지꽃, 머위, 쑥, 취 등 이름 모를 수많은 어린 풀들이 돋아나 있다. 여기가 이렇게 예쁘고 아름다웠었나….

꽃보다 오히려 연둣빛 새순이 바람에 일렁이는 것이 더욱 황홀하다. 아직 다 보지도 못했는데 남편이 돌아가자고 부른다. 산 속은 어둠이 더 빠르기 때문이다. 나는 가다가 뒤돌아보고 또 다시 돌아본다. 이제 4월 이 봄이 지나가면 여긴 다시 올 수 없다. 잎이 우거지고 뱀에 벌에 왕개미에 풀벌레들이 많아지면 갈 수가 없는 까닭이다. 머위잎 몇 장과 잔대순 몇 개를 들고 일 년에 단 한 번의 즐거운 소풍을 마치고 돌아왔다. 그 산에 그 골짜기의 주인이 아닐지라도 그 모든 것은 누리는 자의 것이 아닐까. 이제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앉고, 4월도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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