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수필-귀농아지매 장정해 씨의 추억은 방울방울

아버지의 누룽지는 
시간의 마디를 거스르는
아름답고 슬픈 추억...

2017년도 며칠 남지 않았다. 한 해가 끝날 무렵이면 사람들은 시간을 카운트한다. 흐르는 강물처럼, 이음새가 하나 없는 실처럼, 시간은 쉼 없이 흐를 뿐인데 사람들은 시간의 마디를 만들고 의미를 새겨 유한한 삶을 더 단단하게 하려한다. 

나는 다음 달에 인도단기선교에 함께 가기로 해서 올해 마지막 달의 의미보다 내달 여행의 준비로 맘이 더 분주하다. 낯선 여행지의 날씨, 여정, 문화, 언어, 음식 등의 준비로 한 달 남은 시간이 부족해 보인다. 무엇보다 방문지는 위생에 문제가 있고 인도 카레가 독하니까 누룽지를 만들어 가서 뜨거운 물을 부어 먹으면 아침 정도는 해결이 된다는 선배들의 말에 열심히 누룽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밖에는 어느새 한겨울 추위가 빈 나뭇가지를 흔들고 방안에는 누룽지 타는 냄새가 진동을 한다. 전기밥솥의 밥 한 주걱을 무쇠냄비 바닥에 젖은 손으로 밥알을 구석구석 잘 바르고 바닥에서 따닥따닥 소리가 날 때 주걱으로 눌러 얇게 펴 누룽지를 만든다. 방안이 누룽지 냄새로 가득하다. 추위를 무릅쓰고 거실 창을 열어 통풍을 한다. 사람의 여러 감각기관 중에도 후각은 기억과 참 깊은 관련이 있나보다. 누룽지 냄새가 창 밖으로 빠져나가면서 갑자기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일제시대 육형제의 장남으로 태어나셨고 허랑하신 아버지가 재산을 가지고 만주로 떠나시는 통에 어머니랑 어렵게 살았다. 해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충북농업학교에 들어갔다. 기숙학교라 먹고 잘 수 있어서였다. 총독부가 조선인의 민족적 저항을 말살, 약화시키려고 인문교육, 고등교육을 배제하고 쌀 반출 강화와 조선미곡 개량, 증산을 목적으로 농업교육을 강화해서 조선 팔도에 농업학교를 세웠지만 아버지에겐 다행한 일이었다. 

아버지는 실습위주의 완전한 농사를 짓는 고된 노동과 검소, 성실, 근면을 강조하는 엄격한 교칙을 지켜야 하는 힘든 수업을 달갑게 받으셨다. 시험공부를 할 땐 이마 앞에 칼을 매달아두고 졸다가 이마가 찔려 피가 나도록 열심히 공부를 하셨다. 그래서 아버지는 성적도 우수하셨다. 일본인이었던 담임선생님이 아버지를 잘 봐주시고 아껴주셔서 일본 학생만 맡을 수 있다는‘스위징’을 맡게 됐다. 그것은 학교에서 생산한 작물로 선생과 기숙학생 전원의 식사를 제공하고, 식품창고의 출납을 관장하는 일로, 학교의 신임이 두터운 자라야 할 수 있었다. 

오전엔 교실에서 수업을 하고 오후엔 농장에서 실습을 하는데, 당근을 뽑다가 하나를 먹었다고 바로 퇴학을 당할 정도로 교칙이 무섭고 엄격했다고 한다. 교사와 학생 전체가 식사를 하고나면 남는 것은 가마솥의 누룽지였다. 그러면 큰대바구니에 누룽지를 말려두는데, 그것이 일주일 정도 지나면 엄청 많아져서 포대자루에 넣어 창고에 뒀다. 모든 식재료의 출납을 기록하며 수치가 맞아야했는데, 누룽지는 기록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외출이 허락되는 날 집에 가서 동생들과 약속을 하고 매주 정해진 날과 시각에 학교 뒤 담벼락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리고 약속 날을 기다려 모두가 잠든 깊은 밤 창고를 열고 자기 힘으로 멜 수 있을 만큼 누룽지 자루를 메고 담벼락 너머로 던지면 동생들이 그 자루를 받아 갔었다. 일제시대 나라 위해 목숨을 건 독립운동도 아니고 서스펜스 넘치는 스파이 얘기도 아니다. 일본인의 엄격한 검열을 벗어난 누룽지는 아버지 형제들이 가난을 버텨낸 한 때의 식량이 됐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누룽지를 찾는 까닭과 아버지 때의 누룽지 값은 매우 다르지만 나는 아버지의 누룽지를 오래 곱씹는다. 시간의 마디를 거스를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이렇듯 맘에 오래토록 녹여 먹는 아름답고 슬픈 추억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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