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명견 교수의 재미있고 유익한 옷 이야기(13)

▲ 스커트를 입기 전 크리놀린을 입은 모습(사진 왼쪽)과 크리놀린 위에 스커트를 입은 모습.

옷 속에 감춘 배려의
마음이 스며나올 때
존경과 사랑을 받는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갖추고도 몹시 미움을 받았던 인물들이 있는가 하면, 사치스럽고 멋지게 꾸미고도 사랑받은 여인들이 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미움 받은 대표적인 멋쟁이였다. 그녀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아버지와 오스트리아의 여황제인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이었다. 당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오랜 숙적관계였다.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을 모면코자, 적국 왕자(훗날 루이 16세)와 14살 마리 앙투아네트의 정략결혼이 성사됐다.

그러나 그녀가 적국의 공주라는 것만으로도 프랑스 국민들의 미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사치스러운 의상과 보석에만 관심이 있었고, 화려한 파티로 세월을 보냈다. 설상가상으로 프랑스엔 흉년이 계속돼 수많은 국민이 굶어 죽었다. 이 절박한 시점에서 빵을 달라는 국민들에게 ‘철없는’ 왕비 앙투아네트는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될 것 아냐!”라고 말했다 한다.

이 말이 진실인지, 아니면 그녀에게 적개심을 가진 자들이 악의로 만들어낸 이야기인지는 확인되지 않으나, 당시 많은 국민들이 이 말을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미움은 분노로 이어졌고, 혁명에 불을 붙이는 계기가 됐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자신과 남편을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 비운의 여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옷의 측면에서 보면 마리 앙투아네트는 전무후무한 멋쟁이로 복식사상 가장 찬란한 복식문화를 만들어낸 공로자 중 하나이기도 하다.

나폴레옹 3세의 황후인 유제니 역시 사치스럽고 대단한 멋쟁이였다. 그녀가 수에즈운하 개통식에 수백 벌의 옷을 가지고 갔다는 기록도 있고, 찰스 프레드릭 워스라는 전속 디자이너까지 두어, 아름다운 옷을 수없이 만들어 입었다. 천재적 디자이너인 워스가 만든 옷을 아름다운 유제니가 입고 나타나면 전 유럽의 여성들이 따라하기 바빴다. 이 두 사람이 만들어낸 유행은 크리놀린(crinoline)이란 이름으로 복식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을 정도다. 그러나 앙투아네트와 달리 그녀는 온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그렇게 사치스러운 유제니가 어떻게 온 국민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을까.

크리놀린이란 치마폭을 부풀리기 위해 스커트 안쪽에 입은 새장 같은 버팀대다. 이 크리놀린의 유행은 치마폭을 더욱더 넓혀가면서 여러 가지 폐해를 남기게 됐다. 무도회장이 아무리 넓어도 크리놀린의 여인이 몇 명만 모이면 가득 찼고, 비상시에는 문을 빠져 나오기 힘들어 대형 사고를 내게도 했다.

유제니는 이 같은 상황을 구경만하지 않고, 문제 해결에 앞장섰다. 당시 패션 리더의 하나였던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과 함께 문제의 크리놀린을 착용하지 말자고 약속한다. 바로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헤아릴 줄 아는 마음 씀씀이가 온 국민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고 생각된다.

이 두 왕비를 통해 아름다운 옷으로가 아닌, 옷 속에 감춘 배려의 마음이 스며나올 때, 주변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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