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쌉쌀한 인생

연이틀 영화를 보긴 처음이다. 여차하면 하루가 휙 지나간다. 일주일이 그랬고 한 달이 그러더니 마지막 남은 달력 한 장이 벽에 달랑 달려있다. 한 해 동안 무얼 했나 생각해도 뚜렷하게 떠오르는 일보다는 허전한 마음이 앞선다. 손가락 사이로 달아나는 시간의 헛헛함을 달래고 한해를 사느라 애쓴 내게 작은 이벤트라도 하고 싶어서 영화를 보게 되었다. 로맨스 영화 두 편을 골랐고 하루에 한 편씩 오로지 나를 위해 즐기기로 했다.

<미스 사이공>은 뮤지컬 영화였다. ‘미스 사이공 공연 25주년’을 맞아 영국 무대에 오른 공연 실황을 스크린을 통해 보게 되었다. 세 시간짜리 영화였고 일반 영화보다 두 배 비싼 가격이었지만 아깝지 않았다. 베트남 전쟁 속에서 꽃 피운 베트남 여인 킴과 미군 장교 크리스의 아름답지만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그렸다. 무표정하지만 슬픔을 가득 담고 어린 아들을 바라보는 베트남 여인의 눈빛이 처연했다. 애절한 러브스토리는 아들을 위해 희생하는 모성과 사랑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라라 랜드>는 꿈을 꾸는 사람들을 위한 별들의 도시라는 ‘라라 랜드’를 배경으로 재즈 피아니스트 지망생과 배우 지망생의 꿈을 향한 여정이 사계(四季)로 구분하여 펼쳤다. 현재에서 과거와 미래로 마주하게 되는 수천 개의 감정들을 로맨스로 말해준다. 사랑하면서 겪게 되는 설렘과 슬픔, 동화와 현실의 마법 같은 스토리가 화려한 퍼포먼스와 재즈 선율을 타고 펼쳐졌다. 재즈가 이토록 설레고 슬프다니! 당분간은 재즈 음악을 자주 들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영화를 본 후 며칠 지나 우리 부부에게 결혼 30주년의 날이 왔다. 내심 기대를 했지만 무심한 남편은 기념일인줄도 모르고 장미꽃 한 송이도 건 낼 줄 모르는 삶에 지친 늙어가는 한 남자였다. 영화 속의 로맨틱한 장면들이 빠르게 스쳐가며 나의 현실은 영화와 다르다고 일침을 가했다.  
여자는 사랑받는 느낌을 받을 때 행복해진다. 살아가면서 뭐 그리 대단하고 큰일에 행복해했던가? 작은 것에 감동하고 작은 것에 울고 웃던 게 나였다. ‘행복은 큰 비용이 들지 않는다’라는 게 내 지론이다.

▲ 류미월 시인, 수필가, 문학강사

삶의 현장에서 버티느라 감성도 메말라 가고 기념일조차도 기억 못 하는 바로 옆의 동반자가 절망감을 주지만 나는 로맨스를 꿈꾸는 일을 포기하지 않으련다. 사랑만큼 이 세상을 지탱하고 견디게 하는 중독이 어디 있으랴. 비록 환상에 그칠지라도 새해 또다시 로맨스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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