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쌉쌀한 인생

노란 비늘처럼 쌓인 은행잎을 밟고 걷다가 고개를 들면 가시만 남은 고기처럼 나목들이 서 있다. 파란 하늘대신 바다가 일렁이고 파도 소리가 빈 가슴을 때리는 것만 같다. 만물이 소멸해 가는 이맘때는 그림자 속에도 허허로움과 적막감이 깃든다. 보내는 것과 맞이하는 것들 사이에 놓인 11월은 징검돌 같다.

두툼한 옷들을 꺼내놓고 화분을 안으로 들여놓으며 저장 음식을 만들어 하나둘씩 겨울 채비를 한다. 냉기가 주는 마음속의 헛헛함을 매콤하게 메워주고 힘 있는 겨울을 나기 위해 오래전부터 이 무렵이면 김장을 했나 보다.

김장철을 맞은 마트에는 배추와 젓갈류, 양념 재료들로 가득하다. 김장하는 날 치러야 할 수고를 생각하면 꾀를 부리고 싶을 때도 있다. 추운 날 고생하지 않고 완제품 김치를 사 먹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이런 편리함을 마다하고 올해 두 번째 김장에 도전해보려고 한다.

이 나이에 두 번째 김장이라니, 살다 보니…. 직장 다닐 때는 친정엄마가 해주었고 그 후엔 언니네 집에 가서 함께 김장을 했다. 작년엔 큰마음을 먹고 김장 60kg을 직접 담갔다. 김장에 관한 유익한 정보는 많지만 직접 경험이 적은 탓에 무채는 얇게 썰어졌고 배는 많이 갈아 넣어 양념이 질척했으며 너무 빨리 익었다. 하지만 직접 담갔다는 사실이 뿌듯했고 힘을 합친 식구들과의 어우러짐이 좋았다. 양파와 생강을 갈 때 퍼지는 향과 고춧가루로 준비된 양념을 쓱쓱 버무리다 보면 가슴속에 응어리진 아프고 슬펐던 감정마저 버무려지는 듯하다.

칼칼한 양념 맛과 향에 취하다 보면 독감 예방주사를 맞은 것처럼 든든해진다. 김치를 먹을 때마다 이런 느낌들이 함께 배어 나와서 인지 사온 김치와는 비교할 수 없는 깊고 오묘한 맛을 준다. 요즘 이웃을 만나면 “그 집은 김장 언제 해?” 안부 대신 묻는 말이다. 김장을 담그는 일은 내게는 늘 버거운 숙제다. 이번엔 실수하지 않고 제대로 된 김치를 담그고 싶다.

▲ 류미월 시인, 수필가, 문학강사

11월은 얼마 남지 않은 통장 잔액처럼 바닥을 치기 전에 다시 일어서고 채워야 한다는 마음을 갖게 한다. 가을과 겨울 사이에 자리한 11월은 한 해가 가기 전 간이역처럼 다행이다 싶고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자의식의 헛된 욕망에 사로잡히기 보다는 이미 주어진 작고 소박한 것을 되돌아보게 한다. 조락의 계절은 내게도 필요 없는 장식들을 내려놓으라는 깨달음을 준다. ‘준비’와 ‘비움’을 줘서 든든해지고 홀가분해지는, 11월이 좋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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