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쌉쌀한 인생

여름엔 그러지 않았는데 가을에 들어오면서부터 자주 집 밖을 나가게 된다. 가을 추수처럼 햇볕이 무르익은 듯하고 거리도 겸손하게 가을을 맞이하는 듯하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인근 탄천을 자주 걷게 된다. 멀쑥하게 키 큰 갈대가 수줍게 흔들거리고 물가엔 백로와 청둥오리들이 삼삼오오 정겹다.
그들을 보노라면 나도 모르게 “뭔가 잘 풀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갱년기에 접어드니 예전보다 운동을 챙기게 된다. 가을 햇빛에 비타민D를 보충하는 것이 건강에 이롭지 않겠느냐는 의무감 같은 걸로 걷기 시작한 것인데, 걷다 보니 모든 것들로부터 해방된 느낌이다. 건강으로부터 생각으로부터 모든 것들로부터.

걷다가 그만두는 것도 내 마음이고 벤치에 앉는 것도 내 마음이고 생각을 그만 두는 것도 내 마음이다. 그러다가 꽃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먼 곳에선 국화처럼 보였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구절초다. 구절초는 9월9일에 꺾어서 시집가는 딸에게 달여 먹일 정도로 여자들에게 효능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구절초와 쑥부쟁이를 구별 못 했는데 이젠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다. 쉽게는 꽃잎이 흰색이면 구절초이고 보라색이면 ‘쑥을 캐는 불쟁이의 딸’에서 유래한 ‘쑥부쟁이’ 이다. 조금만 관심을 두고 꽃 이름이 붙어있는 안내판을 보거나 스마트폰으로 검색해 보면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다. 관심 있게 보고 호기심을 가지면 야생화를 제대로 알아가는 재미가 있다. 무엇이든 덤벙대고 대충대충 지나가면 제대로 아는 것이 없다. 실수의 오류가 반복될 뿐이다.

여자들은 잠시 정지된 차 안에서도 화장을 할 수 있다. 핸드백에서 콤팩트를 꺼내서 얼굴에 바르고 색조 화장까지 마무리할 수 있다. 요리조리 시간을 재단해가며 살림도 잘하고 바깥일도 잘할 수 있다. 이렇게 시간을 함부로 낭비하지 않고 잘 활용하는 사람들을 보면 ‘시간의 부자’로 사는 것 같아 부러운 마음이 든다.

▲ 류미월 시인, 수필가, 문학강사

돌아보면 내게 이로움을 주는 귀한 것들은 공짜일 때가 많았다. 부모님이 주셨던 사랑이 그랬고 공기와 햇빛과 적절한 바람, 주변의 좋은 경치도 모두 공짜였다. 시간의 주인공이 되는 것도 마음먹고 실천하면 공짜였다.
하지만 건강을 잃으면 이런 공짜를 누릴 수가 없지 않겠나. 올가을엔 나와의 약속을 지키며 일주일에 서너 번은 집 밖을 걸을 것이다. 가을바람에 지는 낙엽은 건강을 다짐하게 한다. 마치 떨어지는 죽음 앞엔 ‘모든 게 다 헛거!’라는 듯 후드득 떨어진다.

저작권자 © 농촌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