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쌉쌀한 인생

농촌에 사는 친구가 밤을 주워 가란다. 생각 없이 나섰는데 ‘알밤휴게소’가 있고 계속해 달리다 보니 벼 베기가 한창인 논들이 널려있다. 내 차 옆으론 자전거를 타고 가는 청년이 나란히 달리고 있었고 초등학교 4학년 가을 운동회가 자연스럽게 겹쳐졌다. 그때 운동장 사열대 위에는 상품이 내 키만큼 쌓여있었지 아마. ‘賞’이라는 큰 글씨가 찍힌 두툼한 공책 묶음이 얼마나 탐이 나던지. 하필이면 내가 달리는 조에 달리기 선수가 있을 게 뭐람. 달리기 시합에서 나는 무리해서 달리다 넘어졌고 무릎을 심하게 다쳤다. 그날 이후로 걸어서 통학하기가 힘들 정도였고.

우리 집은 신작로에서도 한참 들어간 한적한 곳이었다. 담임선생님은 자전거로 통근하셨고 무릎을 다친 다음 날부터 선생님의 자전거 뒷자리가 내 자리였다.
당시엔 선생님이니까 당연히 해주시는 줄만 알았다. 그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자식을 키우면서 깨닫게 되었다. 내가 선생님의 처지였다면 그런 실천을 할 수 있었을까? 그때는 감사하다는 말도 제대로 못 했고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가을 길을 달리다 문득 선생님이 그리워졌다.

‘김영란법’이 시행되면서 교수에게 캔 커피를 줬다고 신고하는 세상이 돼버렸다. 없어져야 할 것은 없어져야 할 세상이지만, 세상의 따스한 것들마저 사라지는 것 같아서 씁쓸해진다. 변화의 물결에 투명하지 못한 것들만 사라졌으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달리다 보니 목적지에 도착했고 친구들이 모였다. 저녁연기가 오르는 굴뚝이 정겨웠고 친구는 우리를 위해 구들장을 따끈하게 데워놓았다. 저녁상에 오른 아욱국은 텃밭에서 바로 캐서 끓여선지 더 구수했다. 산자락에 위치한 친구의 집은 탁 트인 공간 덕분에 체증이 확 뚫리는 것 같았다.

마침 약속에 나와 있는 것처럼 가을비가 내렸다. 처마 끝에 달린 풍경소리가 빗소리에 맞춰 중저음의 소리를 냈고 내리는 비가 아플까 봐 풀들은 온몸을 다해 비들을 받아 안는다.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방에 누워있으니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아궁이 장작불에선 밤이 탁~ 타닥! 익어가는 소리가 어떤 음악보다도 감미롭게 들렸다.

▲ 류미월(시인, 수필가, 문학강사)

도시를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여유로워졌다. 농작물이 익어가는 농촌을 자주 찾아야겠다. 복잡하지 않고 넘치지 않는 것들의 생명이 따사롭게 눈을 맞춘다. 바라만 봐도 마음이 부자가 되는 솥단지만 한 누런 호박, 가지, 노각, 빨간 고추, 그리고 알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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