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쌉쌀한 인생

매미들 합창에 귀뚜라미가 슬쩍 끼어드는 걸 보니 가을이 오기는 오는 모양이다. 고대 중국인들은 귀뚜라미를 촉직(促織) 이라고 불렀다. 날이 추워지니 빨리 베를 짜라고 재촉하듯 우는 벌레라는 뜻이란다. 그래선지 귀뚜라미 소리가 또렷해지면 마음이 서둘러지고 여름 내내 게을렀던 마음을 다잡게 된다. 책도 읽고 싶고 옷 정리도 하고, 생각도 깊어지고 손길까지 바빠진다.

그런 심신 위로 추석이 손을 내밀지만 주부의 마음은 기쁨 반 걱정 반이다. 가족을 만나는 반가움도 있지만 힘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음식 장만이며 설거지며 차례 챙기기며... 나도 모르게 ‘여자로 태어난 게 죄지’라며 혼잣말을 하게 된다.
때를 맞춰 매스컴에서는 공항에서 북적이며 가볍게 떠나는 여행객들을 단골로 보여준다. 나와는 먼 나라 사람들처럼 보인다.

같은 여자라도 달력에서 빨간 글자를 온전히 즐기는 여자와 그렇지 않은 여자로 나뉜다. 제사를 모시지 않는 집이 있는가 하면 대가족이 모여 제사를 지내는 집안도 있다. 큰일을 원활하게 선두 지휘하는 종부는 위대해 보인다. 같은 여자라도 마음 씀씀이에 존경심이 든다.

오래전 추석이 생각났다. 동서 셋이 모여 앉아 송편을 빚었었다. 성도 각각, 성격도 각각이었다. 서로 알아가면서 서먹할 때도 있었지만 무난하게 대화가 잘 통했다. 허리가 아플 정도로 송편을 빚어대도 줄어들지 않는 큰 반죽 앞에서 걱정이 앞섰다가도 순식간에 공장을 가동하듯 송편을 만들었다. 크고 두툼한 송편, 작고 야무진 송편, 군만두처럼 길쭉한 모양의 송편들...‘여자의 힘은 위대하다’라며 깔깔댔었다. 솔잎을 깔고 잘 쪄낸 송편을 맛볼 때는 으쓱했다. 만들기는 힘들었지만 맛있고 뿌듯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깡충깡충 뛰면서 제 엄마가 만든 송편을 쟁반에서 콕 찍어서 알아맞히는 것도 재미있는 추억으로 남았다.

▲ 류미월(시인, 수필가, 문학강사)

명절에 훌훌 자유로운 사람에게 ‘복이 많아서 좋겠다’고 물으면 약간의 억압이 있을 때가 구심점이 있어서 좋다고 한다. 너무 자유로우면 오히려 불안한 게 사람 심리인지. 식구끼리 둘러앉아 여러 가지 전과 송편과 토란국을 만들고 함께 먹었던 구수하고 개운한 후각과 미각의 기억은 강하고 오래간다. 고모가 오시고 오래된 친척들 얼굴을 보는 것도 이맘때였다.
사람은 외로운 섬이다. 섬을 달래주고 비추는 곳은 포구다. 고향은 포구다. 등불을 켠 채로 썰물이 다할 때까지 비춘다. 추석 무렵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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