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쌉쌀한 인생

노안이 시작돼 어쩔 수 없이 안경을 맞춰야 했다. 그런데 안경을 쓰고 보니 보통 불편한 게 아니다. 자국이 남는 것도 신경이 쓰이고 더운 날엔 거추장스럽기까지 하다. 요즘 ‘라식’(각막의 표면을 벗겨낸 후 레이저로 시력 교정을 한 후 원래 상태로 접합하는 기술) 수술이 유행이란 말에 귀가 솔깃해진다. 눈이 밝아야 사물과 세상의 본질을 제대로 볼 수 있을 테니까.

‘안경과 관련된’ 수필 하나를 읽었다. “팔순이 된 아버지의 귓속에 암이 생겼다. 다른 장기로의 전이를 막기 위해 왼쪽 귀부터 뺨 전체를 도려내고 허벅지 살을 떼어 이식해야 할 상황이 되었다. 수술 전 부친은 담당 의사에게 부탁하길, 귀를 없애더라도 귀가 있던 자리 위쪽에 작은 살점은 붙여놓으라”고 하셨다. 여기서 ‘작은 살점’은 수술 후 몸이 회복되면 안경을 걸고 싶은 안경 걸이의 역할을 반영한 소망이었다.

청력은 생을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기능을 다 한다던데, 사는 동안에 타인을 보고 싶은 한계점은 어디까지일까. 내 모습의 단점은 되도록 남에게 노출하길 꺼리면서 상대방의 작은 티라도 보려는 이중의 잣대가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건 아닌지.
승용차의 짙은 선팅이 그렇고 최근에 유행하는 ‘미러(mirror) 선글라스’가 그런 예에 해당하는 건 아닌지. 표면이 반사경처럼 빛나며 여름 느낌이 물씬 나기에 나도 한번 써봤는데 내 표정은 드러나지 않으면서 상대방을 은밀하게 관찰하기에 적합했다. 휴양지가 아니더라도 평상시에 ‘미러 선글라스’를 쓰고 다니는 이들을 자주 본다.

살아가면서 때에 따라 자신도 모르게 쓰게 되는 것이 허세라는 가면이다. 검은색에 가깝고 알이 큰 선글라스는 어쩌면 축소된 가면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면의 핵심 역할을 하는 눈과 얼굴의 반을 가려주니 말이다. 살다 보면 남 앞에서 필요 이상으로 자신을 속이며 과장할 때도 있지만, 가면이 벗겨지고 추한 속살이 드러났을 때의 신뢰감의 추락이란 생각만으로도 피하고 싶다.

▲ 류미월(시인, 수필가, 문학강사)

안경들을 떠올리다가 기능 뒤에 숨겨진 가면과 같은 ‘겉과 속’이 다른 심리를 생각해봤다. 적당히 투명한 선글라스를 착용한 사람이 솔직해 보여서 좋다. 사회에서 어떤 물의를 일으킨 사람들은 대부분 짙은 선글라스나 모자를 쓰고 위장한다. 뒤늦게라도 가면을 벗고 사죄하는 얼굴을 볼 때면 사람이기에 사악함도 있었겠지! 싶다.
나부터 안경을 벗어보자! 싶다. 안경 하나 벗었을 뿐인데 세상에 좀 더 솔직해지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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