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쌉쌀한 인생

웬일? 싶었다. 청소기를 열심히 돌리던 남편이 갑자기 고개를 휙 돌린다. 손에는 거실 바닥 틈새에서 찾은 손톱이 들려있다. 남편이 말했다. “제발, 함부로 손톱 좀 깎지 마. 이런 건 청소기로도 안 빨린다 말이야.”
아내의 입장에선 어이가 없다. 누구 손톱인지 모르는 손톱까지도 내 책임이라니. 노안이 되면서 얌전히 깎아도 튀어나간 손톱이 안 보이긴 하지만 내 것이란 보장은 없지 않은가. 저 사람이 그때 그 남자였다니. 나의 20대를 두근거리게 했던 그 남자였다니. 아랫배가 불룩하고 반쯤 머리가 벗겨진 저 남자가.

오랜만에 K에게 안부전화를 했다. 평소와 달리 통화시간이 짧았다. 그 짧은 동안에 돌아서면 밥(먹는 남편)이고 돌아서면 밥(먹는 남편)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소연이다. 밥 먹는 남자만큼 무서운 남자는 없다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
퇴직한 남자들 몇 명이 자금을 모아서 작은 오피스텔을 구하고 출근하듯 이용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들었다. 이 눈치 저 눈치 안 보고 살아보려는 해법처럼 보인다. 누구나 해당할 수는 없는 것이겠지만.

예전 부모님의 삶은 사계절용이었다. 씨를 뿌리고 거름을 주고 김을 매야 했다. 배추를 심고 고추를 따고 감자를 캐고 김장을 준비하고 무청을 처마에 매달았다. 새끼를 꼬고 가마니를 짜고 한겨울에도 농한기가 아니었다. 생계를 위해선지 사랑을 위해선지 오손도손 손을 모았고 부부는 필요한 존재였다.
요즘 도시 남자의 삶은, 특히 퇴직 남자의 삶은 할 일이 없는 삶처럼 보인다. 새로 산 등산화를 한 달에 한 번 밖에 못 신었다는 남자의 얘기도 들은 적이 있다. 심심한 남편은 물 마시려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 시든 채소를 발견하고 냉동실을 열었다가 작년 추석 송편을 발견하고는 부부싸움이 난다. 할퀴고 상처 주기 위해 결혼한 것처럼 싸운다.

▲ 류미월(시인, 수필가, 문학강사)

대파는 뿌리가 하얗고 생명력이 강한 채소다. 그래서인지 결혼식장 단골 주례사는 “남편과 아내는 검은 머리 파 뿌리 되도록 평생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까?”였다. 그리고 신랑신부는 “네!”라고 대답했었다. 망설임이 없었고 마땅히 그렇게 살 것으로 믿었었다. 지금 그 마음이 있건 없건 예전에는 그랬었다.
최근 들어 성당 교리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노트에 성경을 필사하며 마음을 다스리는 중이다. 그 맹세는 어디 가고 둘 사이에 침묵만 남아있다니. 파뿌리처럼 자라는 새치를 볼 때면 “네!”라고 대답했던 옛 맹세가 한없이 작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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