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쌉쌀한 인생

장날은 구경만으로도 즐겁다. 할머니들이 캐온 달래, 원추리나물, 두릅, 그릇마다 담겨있는 수수, 기장, 검은콩들이 햇것의 싱싱함과 고향에 온 것처럼 푸근함을 준다. 물건들을 펼쳐놓은 할머니가 두릅과 바꾼 돈을 주머니에 넣으며 기뻐하신다. “그 돈 뭐하시게요?” 하고 묻자 “손주 주려고” 하신다. 그 옆의 떡장수는 전남 영광에서 가져왔다는 떡을 파느라 바쁘다. 모싯잎 송편을 사서 맛을 보니 통동부가 씹히는 맛이 그만이다. 느림보 걸음으로 급할 것도 없이 살펴보는 장날 풍경이 마냥 좋다. 나물과 잡곡 구경을 하고 걷다가 어린 시절 기억 때문인지 잡화상을 지나 신발을 파는 곳에 발길이 멈춰 섰다.

까마득한 날이었다. 잠결에 발이 간지러워 보면 어머니는 내 발의 치수를 굵은 실로 재서 자른 후 지갑에 잘 넣어두셨다. 장날이면 잡곡을 내다 파신 돈으로 어둑어둑할 무렵에 생필품을 한 짐 이고 오셨다. 대문에 들어서는 엄마의 짐 보따리를 받아 펼치면 치약, 비누, 꽃씨 그리고 자로 잰 듯이 내 발에 꼭 맞는 신발이 들어있었다. 엄마의 고단한 하루는 헤아리지도 못 했다.
그리움인지 황사 탓인지 몽롱하게 걷다 보니 한약 재료들이 눈에 들어온다. 닭백숙에 넣을 재료로 가시가 달린 엄나무 한 묶음을 샀다.

장이 서는 장터는 인생의 축소판처럼 보인다. 삶의 활기가 느껴져서 좋다. 팔아서 좋고 사서 좋은 날이다. 각자 사는 게 바빠서인지 반가운 얼굴들을 장터에서나 만나기도 한다. 한참을 구경하다 다리가 아파질 즘 장터 식당에 앉아 파전에 막걸리 한잔하면 마음의 여유가 뭉게구름처럼 피어난다.
두 번 만나면 한 해가 가고 마는 초등학교 친구들을 며칠 전에 만났다. 구순이 넘은 친구 모친 안부를 물었다. 치매라고 했다. 만나고 온 지 이틀 만에 부음 소식이 날아왔다. 양친을 다 여읜 친구들이 늘어간다. 부모님을 보내고 하늘 아래 고아처럼 쓸쓸하다고 울먹인다. 먼저 고아 신세가 된 내게 ‘선배 고아’의 심정이 이제야 헤아려진다며 그동안 얼마나 허전했냐고 묻는다.

▲ 류미월(시인, 수필가, 문학강사)

없는 것 빼고는 다 파는 게 장날 풍경이다. 펼쳐놓은 나물에 물을 뿌리고 다듬고 최고의 상품으로 손을 보는 할머니의 뒷모습에 대고 “엄마!” 하고 부를 뻔했다. 착각이라도 하고 싶은 봄날이다. 한쪽에선 강냉이 튀기는 소리가 요란하다. 메케한 연기가 옛 기억들을 불러온다.
봄의 난전에서 돌아서 오는 길가에 꽃잎은 왜 그리 흩날리며 떨어지는 건지….
내 마음을 아는 듯 모르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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