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쌉쌀한 인생

이맘때면 한 해를 살아내느라 수고한 육신 앞에 위로의 포도주 한 잔을 기꺼이 권하고 싶어진다. 반면에 허상으로 무장했던 가면을 훌훌 벗고 진정한 맨살의 나와 마주하고 싶어지는 시점이기도 하다.
주말에 홀로 산행을 했다. 올겨울엔 유난히 흐린 날이 많다. 잿빛 하늘을 보며 걷는 동안 멜랑꼴리한 기분에 빠지기도 하지만 이런 침묵의 시간이 좋다. 낙엽 쌓인 길을 걷다 보면 이파리를 떨군 나목들이 홀가분함을 안겨준다.

많은 걸 내려놓으라는 암시처럼... 나무들 사이로 넓어진 시야를 즐기며 걷다가 하산 길을 서둘렀다. 저녁에 가족들과 영화 ‘히말라야’를 보기로 해서다.
나는 배우 황정민의 팬이다. 그가 주연한 이 영화는 마치 내가 히말라야의 한 지점에 있는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영화 속에서 ‘엄홍길(황정민분)대장’은 설산 고지를 정복 한 후 소감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목표지점을 정복한 순간 대단한 느낌과 생각을 했을 줄 알지만, 정작 내가 느낀 건 가장 힘들었을 때 진짜 내 모습과 마주한 일”이라고 했다. 말이 없이 침묵할 때, 가장 솔직해질 때 마음으로부터 내면의 소리를 듣게 된다.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 내 모습이 관찰된다.

독일의 작가 막스 피카르트는 《침묵의 세계》에서 “침묵은 시간이 성숙하게 될 토양이고 인간은 침묵에 의해 관찰당하고 침묵은 인간을 시험한다.”라고 말했다.
영화는 가파른 히말라야 등반 중 눈사태, 크레바스 등 각종 위험요소들이 전개되며 인간의 한계와 인내심을 시험하듯 냉혹하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침묵의 시간은 생의 무게감을 고스란히 전해주듯 표현된 말보다 더 많은 의미를 준다.

올해의 모래시계가 서서히 낙하를 멈추려고 한다. 며칠 후면 새로운 시간의 모래알이 낙하할 것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계획하는 이맘때면 진실의 옷을 입고 솔직해지고 싶어진다. 내 안의 침묵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싶어진다.
새해 달력의 숫자들을 보며 깊이 생각하며 새로운 계획을 그려보는 일. 외로움과 맞서보자. 거리에 늘어선 커피숍에 들어서면 소음이 가득하다. 광화문 앞도 여의도의 정치판도 조용할 날이 없다. 분주한 송년의 발걸음에서 되돌아와 잠시 침묵과 마주해보자.

▲ 류미월(시인, 수필가, 문학강사)

창밖에는 눈이 내린다. 흰 눈은 잘난 사람이든 못난 사람이든 어깨 위로 평등하게 내린다. 올해의 과오는 덮고 새롭게 잘 살아보라는 메시지처럼. 먼 곳에서 출발한 눈이 침묵으로 축복하듯 선물처럼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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