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쌉쌀한 인생

잘 익은 대추가 탐스럽다. 모란시장 구경을 하다가 햇대추를 조금 샀다. 대추를 한입 깨물다 문득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라는 오래전에 막을 내린 농촌드라마가 생각났다. 아웅다웅 사람 살아가는 냄새에 다음 방영을 기다리던 드라마였다. 문득 대추나무에 왜 사랑이 걸릴까? 반문해 본다. 대추나무에는 가시가 많다. 연이 날아가다 걸리고 외할머니 부음소식에 어머니의 통곡도 걸려있는 가지다. 우리는 가시처럼 얽히고설켜 살아가다 무심코 가까운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다. 세월의 두께만큼 미운 정, 고운 정이 가시 달린 나무에 사랑이라는 열매로 단단히 걸리게 된다. 울음소리와 사랑을 먹고 자란 나무 열매는 붉다는 듯 붉은 열매로.

나 어릴 때 고향집에는 대추나무가 많았다. 울안에 열린 대추는 껍질이 얇아 금방 시들어서 잘 보관했다가 식재료로 활용했다. 마당가에 열린 단단하고 알이 굵은 대추는 기일이면 제상에 올렸다. 대추는 헛꽃이 없다. 꽃 핀 자리엔 반드시 열매가 열린다. 가지마다 휘어질 정도로 주렁주렁 달린다. 우리 조상들은 후손들이 번성하길 바라는 마음에 집 주변에 대추나무를 많이 심었나 보다. 대추는 씨앗이 하나인데 열매에 비해 씨앗이 큰 대추는 왕을 상징해서 제사상에 올린다는 설도 있다.

추석 무렵 황금들판을 걷다 보면 결실을 맺는 곡식들 앞에 겸허한 마음이 생긴다. 높아진 하늘을 쳐다보다 잠시라도 고귀해지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거다. 가을이 주는 정서인지 돌연 외롭고 높고 쓸쓸한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시인 백석(1912~1995,평북 정주출생)은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귀하게 여기고) 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라고 그의 시 「흰 바람벽이 있어」에서 노래한다.

▲ 류미월 시인, 수필가, 문학강사

며칠 전 종합검진을 받으러 간 병원에서의 일이다. 연로한 할아버지를 아들·딸들이 부축하고 검사가 끝날 때까지 정성껏 돌보고 있었다. 한때는 높고 위풍당당했을 노쇠한 할아버지의 표정은 쓸쓸해 보이지 않았다. 벽조목이라는 대추나무는 벼락을 감내한 뒤에 도장 재료로 유용하게 쓰인다. 벼락같은 질풍이 안으로 삭았을 할아버지의 따뜻한 눈빛도 빛나는 벽조목과 닮았다. 그가 뿌린 자식의 열매가 할아버지라는 큰 대추나무 가지에 주렁주렁 매달려 불을 밝히고 있었다. TV가 아닌 병원 대기실에서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의 드라마를 가을에 만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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