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쌉쌀한 인생

계란은 경전이다. 계란을 사다 냉장고에 모셔두고 문 열고 볼 때마다 든든하고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마치 경을 읽고 난 뒤처럼.
어린 시절 우리 집은 양계장을 했다. 더운 날 닭똥 냄새는 고역이었지만 훈장 같은 벼슬로 경쾌하게 모이를 쪼아 먹는 닭들의 소리는 숲 속 마을의 작은 오케스트라였다. 학교 갔다 와서 언니와 나는 큰 바구니를 들고 계란 빨리 담기 내기를 하다가 그만 와장창 깨트리기 일쑤였다. 그 대가로 아버지가 주는 꿀밤은 따끔했지만 두툼한 프라이를 부쳐 먹던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도시락 반찬으로 단골로 가져가는 계란 부침은 점심시간만 되면 친구들을 내 옆에 모이게 만드는 권력을 발휘했다. 내게도 한때 우쭐했던 시절이었다. 산란을 거의 끝낸 노계들은 팔려나가야 할 운명이다. D데이에는 한밤중에 닭장수들이 와서 한 트럭 가득 모조리 닭을 실어간다. 수지가 안 맞는 돈과 바꿨을 때는 안마당에 빠진 깃털 위로 밤새 내린 이슬처럼 슬픔이 가슴을 적시곤 했다. 아버지는 며칠을 술로 탕진해야만 했다.

내게 계란은 이런저런 추억이 서린 계란이다.
마트에서 계란 한판을 사 오면 깨질세라 소중히 다룬다. 난좌에서 계란을 꺼내 냉장고에 넣을 때는 까마득한 날, 계란을 꺼내 내 키만큼 쌓던 손맛이 잠시 스쳐 허전할 때도 있다.
계란의 종류도 세분화돼서 방사란, 방목란, 목초란, 유정란 등 종류도 많고 많지만 뭐 그리 알의 성분에서 크게 벗어날까만 요란스럽다.

▲ 류미월 시인, 수필가, 문학강사

요즘은 아파트 단지에 어묵 장수, 계란 장수도 돌지 않는다. 아저씨가 골목을 누비며 “계란이 왔어요, 계란이 왔어요......”
가끔은 듣고 싶어지는 알람 같은 소리. 유성기판 같은 소리. 디지털로 치닫는 스피드 시대에 사람의 정이 스민 아날로그 행보가 그리워진다.
계란 한판에 담긴 그중에 하나인 그저 그런 기계적 계란이기보다는, 갓 꺼내 소중한 사람을 주려고 조심스레 담아놓은 특별한 계란으로 대접받고 싶은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계란을 보다가 문득, 생각 하나가 스쳐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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